분류 전체보기690 Jesus You're All I Need Jesus You're All I Need · Darlene Zschech Jesus You're all i need You're all i need Now i give my life to you alone You are all i needJesus You're all i need You're all i need Lord you gave yourself So i could live You are all i needOh you purchased my salvation And wiped away my tears Now i drink You're living water And i'll never thirst again For you alone are holy I'll worship at your throne .. 2019. 3. 15. [문동환목사 25] 해직 교수들 ‘민중 십자가’ 지다 해직 교수들 ‘민중 십자가’ 지다 예수는 부활하자마자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갔다. 갈릴리는 예수 운동이 일어난 가난한 민중들이 사는 땅이었다. 우리들은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신학을 하는 교회를 ‘갈릴리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갈릴리 교회는 해직 교수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세운 ‘예배당 없는 교회’였다. 함께 뭉쳐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날 해직교수들을 모두 방학동 우리집으로 초대했다. 성서 번역을 하느라고 한신대를 떠나 있던 형 익환도 함께한 그 자리에서 나는 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은 1975년 7월17일이었다. 새벽의 집 총무인 최승국이 교섭을 해서 명동에 있는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20명 정도가 모였다. 당회장으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9. 3. 15. [문동환목사 24] 해직 교수, 울 시간이 없었다 해직 교수, 울 시간이 없었다 1975년 월남이 공산화하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지금까지의 긴급조치 가운데 가장 살벌한 ‘긴조 9호’를 발동시켰다. 특히 이 9호에서는, 개헌논의 금지, 학생 정치 관여 불용, 그리고 경찰병력 교내 진입을 합법화하고 있었다. 4월10일에는 문교부에서 휴업령을 내려 전국의 모든 대학 교문이 굳게 닫혔다. 교직원 외에는 아무도 학교에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운동권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기세로 문교부는 우리 한신대 학생 10명의 제적과 함께 안병무와 나의 해임을 명령했다.‘기장’을 대표하는 장로들과 총회장이 긴급 소집을 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증경(전임) 총회장과 강원룡 목사가 포함된 9인 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하기로 했다. 위원회에서는 폐교까지.. 2019. 3. 15. 오병이어와 협동조합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한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꺼냅니다. 그것을 본 5천명의 사람들, 강팍한 유대인들이 몰래 숨겨두었던 자신들의 도시락을 꺼내 나눠먹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배부르게 먹었고, 오히려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작은 사람들이 작은 나눔 자체가 기적입니다. 협동조합은 바로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카톨릭 신앙을 가진 교수님의 메시지에, 꿈뻑꿈뻑 졸던 개신교 목사님들이 일제히 눈을 부라리며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을 폄훼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네, 위의 해석은 보통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가지신 분들의 해석입니다. 카톨릭 신학도 비슷합니다.성경의 기적을 기록된 대로 믿지 않고, 어떤 상징적 의미나 비유 정도로 이해합니다. 저도 말씀을 있는 그.. 2019. 3. 15. 시편 6편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 6:2-3Be gracious to me, O LORD, for I am languishing;O LORD, heal me, for my bones are shaking with terror.My soul is also struck with terror,while you, O LORD - how long? 기도오, 예수 그리스도시여!당신도 사람에게 멸시받고 거절당해 보셨기에,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외로운 절망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 느낌이 어떤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가늘지만 쇠사슬만큼 강한 기도의 줄로이러한 절망에서 건져 주소서... 2019. 3. 15. [문동환목사 23] ‘삭발 학장’이 찢어버린 대학교기 ‘삭발 학장’이 찢어버린 대학교기 1972년 10월17일 대통령 박정희는 기어코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유신독재의 시작이었다. 대학 휴교령과 학생 제적, 강제 징집, 서클 해체 등으로 학생운동은 꽁꽁 얼어붙었다. 1년 가까운 침묵 끝에 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유신철폐 데모가 터졌다. 한신대에서도 이창식 학생회장과 대의원 의장 김성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 양심상 안이하게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학생들이 11월9일부터 열흘 동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채플실에서 예배와 토론으로 신앙적인 결단과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한 이론적인 무장을 계속했다. 우리 교수들도 강의를 할 수가 없으니 날마다 교수 회의실에 모여서 아침 기도회를 열고는 덕담이나 나누면.. 2019. 3. 15. [문동환목사 22] 4·19 혁명에 불참한 ‘한신’의 반성 4·19 혁명에 불참한 ‘한신’의 반성 우리 둘이 결혼에 골인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늘 주장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박형규 목사. 내 아내 페이가 방학에 잠시 한국에 나왔던 1961년 여름, 나는 박형규 목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풋풋하고 열정이 넘치는 목사로 마포교회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경상도 지역 주일학교 교사강습회에 강사로 참석하면서 친해졌다. 강습회를 마치고 부산의 동래 온천탕에 발가벗고 앉아 나는 그에게 결혼에 대한 내 고민을 얘기했다. 박 목사도 사랑한다면 당연히 결혼을 하라고 권했다. 이후 그는 나의 아내를 만날 때마다 자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박 목사와 교류하면서 나는 그가 시작한 수도권 특수지.. 2019. 3. 15. [문동환목사 21] 인혁당 주검 앞 "형제는 용감했다" 인혁당 주검앞 “형제는 용감했다” “처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데 애매한 사람의 목에 밧줄이 걸렸습니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 1975년 4월9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여덟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목요기도회 날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5가로 가던 중 라디오에서 그날 새벽에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가족과 면회할 시간도 주지 않고,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집행을 했단 말인가!’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 격정의 심정으로 강단에 올랐다. 내 설교는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그날 나는 18장에 있는 ‘억울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억울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2019. 3. 15. [문동환목사 20] 암이 앗아간 공동체 기둥 암이 앗아간 공동체 기둥 “아기가 소파에 오줌을 쌀 수도 있지, 왜 그렇게 구박을 해요!” “왜 기껏 정돈해 놓으면 어지르기만 하는 거예요!” “내 자식 내 맘대로 가르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서로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사는 것은 예상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매주일 열리는 가족회의에서 드디어 사소한 불만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우리는 갈등을 회피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워서 잘 풀어 보자는 주의였다. 밤늦게까지 솔직히 풀어놓다 보면 신기하게도 오해가 풀리고 긴장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새벽의 집’ 식구들에게 화해의 기쁨, 하나됨의 기쁨은 종교적인 체험이었다. 우리는 ‘새벽의 집 서약’을 일년마다 새롭게 했다. 일년을.. 2019. 3. 15. [문동환목사 19] 교인들 닥달에 ‘한솥밥’ 먹다 교인들 닥달에 ‘한솥밥’ 먹다 “목사님, 말로만 공동체, 공동체 하면 뭐 합니까?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1971년 11월 어느 월요일, 수도교회의 최승국 청년회장 등 교인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쳐 나를 닦달했다. 바로 전날 주일예배 때 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공동체 운동에 대해 소개했다. 이들이 그 설교를 듣고 찾아와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책임지라고 나에게 도전한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을 비롯해 다섯 가족 15명 정도가 참가한 공동체인 ‘새벽의 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참 묘했다. 내가 의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 말 독일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의 를 읽었다. 산업사회가 개인주의, 물질주의, 권위주의로 인해 .. 2019. 3. 15. 이전 1 ··· 59 60 61 62 63 64 65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