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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목사 24] 해직 교수, 울 시간이 없었다

by 올미랭 2019. 3. 15.

해직 교수, 울 시간이 없었다

 

 1975년 월남이 공산화하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지금까지의 긴급조치 가운데 가장 살벌한 ‘긴조 9호’를 발동시켰다. 특히 이 9호에서는, 개헌논의 금지, 학생 정치 관여 불용, 그리고 경찰병력 교내 진입을 합법화하고 있었다. 4월10일에는 문교부에서 휴업령을 내려 전국의 모든 대학 교문이 굳게 닫혔다. 교직원 외에는 아무도 학교에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운동권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기세로 문교부는 우리 한신대 학생 10명의 제적과 함께 안병무와 나의 해임을 명령했다.

‘기장’을 대표하는 장로들과 총회장이 긴급 소집을 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증경(전임) 총회장과 강원룡 목사가 포함된 9인 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하기로 했다. 위원회에서는 폐교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교수들의 해임을 결정했다. 김정준 학장은 “우리에게 한신빌딩(충무로 위치)이 있어 자랑이었고 다들 부러워했는데, 이제 그 한신빌딩 때문에 우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면서 한탄했다. 빌딩에 대한 세무감사에 들어가면 그 여파로 폐교가 되고 모든 재산이 국가로 환수될 수도 있다는 재정적인 압박을 받은 것이었다.


당황한 이사회는 나와 안병무에게 사퇴서를 쓰라고 권했다. 사퇴서를 쓰면 나중에 복직하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직권고를 들은 우리는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내 한 몸 사리지 않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신학대학 교수에게 사퇴서를 쓰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은 이를 분명히 거절했다. “정부의 지시에 항거할 수 없다면 우리를 해임하시오!” 결국 75년 6월12일 우리는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우리가 해직당하던 그즈음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운동을 뒤에서 조종한다는 이유로 이른바 ‘문제교수’들이 강제해임을 당했다. 백낙청(서울대), 김병걸(경기공전), 김찬국·서남동·성내운(연세대), 이문영·김용준(고려대), 이우정(서울여대), 노명식(경희대) 등이 비슷한 시기에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가 우리를 학교에서 쫓아냄으로써 오히려 더 골수 운동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교수들은 몰려다니면서 더 본격적인 반정부 활동을 모의하게 된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에서 서러움을 겪은 해직 교수들은 서로 끈끈한 동지애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김찬국 교수는 나와는 복음동지회 회원으로 오래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김동길 교수와 함께 연대 학생들의 반정부 신문 발행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70년대 초 벌써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경력이 있었다. 그는 이후 구속자 가족들을 위해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렸던 목요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구속자 가족들을 돕고 기금을 모으는 일을 뒤에서 조용히 하면서 참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아주 부드럽고 유머 감각이 있었다.


이문영 교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였다. 그는 성실한 성결교 교인으로 고대에서 행정학을 가르쳤다. 그는 기독자교수협의회의 회장을, 한완상 교수가 총무를 맡기도 했다. 그와 나는 김재준 목사가 캐나다로 가기 전에 만든 <제3일>이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일에 앞장을 선 것은 박형규 목사였다. 그때 나는 그의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사고는 매우 독특해서 읽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해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제안으로 해직 교수들은 후에 갈릴리교회를 만들었는데 이 교수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유일한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신학자인 안병무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기묘했다.

   이우정 교수는 내가 한신대 학생과장일 적에 여자 기숙사 사감이어서 나와 퍽 가까이서 일을 했다. 양반집에서 태어난 여성이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뭐든 부탁을 하면 “내가 뭘 …” 하면서 꼬리를 뺐다. 그러던 그는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면서부터 호랑이처럼 용감해졌다. 한때 복음동지회 친구인 박봉랑 목사가 이 교수와 나를 중매하려 했다는 얘기를 훗날 들으며 함께 웃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