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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목사 22] 4·19 혁명에 불참한 ‘한신’의 반성

by 올미랭 2019. 3. 15.

4·19 혁명에 불참한 ‘한신’의 반성


우리 둘이 결혼에 골인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늘 주장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박형규 목사. 내 아내 페이가 방학에 잠시 한국에 나왔던 1961년 여름, 나는 박형규 목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풋풋하고 열정이 넘치는 목사로 마포교회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경상도 지역 주일학교 교사강습회에 강사로 참석하면서 친해졌다. 강습회를 마치고 부산의 동래 온천탕에 발가벗고 앉아 나는 그에게 결혼에 대한 내 고민을 얘기했다. 박 목사도 사랑한다면 당연히 결혼을 하라고 권했다. 이후 그는 나의 아내를 만날 때마다 자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박 목사와 교류하면서 나는 그가 시작한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10년 동안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한국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으로 젊은이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한국신학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가 된 나는 청계천에서 빈민활동을 하던 박 목사를 여러 번 강사로 초빙했다. 방학이 되면 학생들을 빈민촌으로 보내 봉사활동을 하도록 했다. 나의 제자들인 허병섭, 이해학, 권호경, 이규상 등은 이미 도시빈민 선교에 뛰어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봉사활동은 여러 해 계속되었다. 그 후 박 목사는 나를 수도권특수지역 선교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했고, 이는 내가 사회운동에 더 깊숙이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교수가 된 것은 1961년 가을. 박정희가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지 불과 몇 달 뒤였다. 김재준 목사님은 학장직을 맡아 모처럼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실천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학교를 통제하고 장악하려는 음모로 모든 대학의 총·학장 가운데 만 60세 이상은 총사퇴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교단의 분열 시기에도 한신대를 굳건히 지켜왔던 나의 스승 김재준은 평생 몸 바쳐 온 학교를 하루아침에 떠나야만 했다. 올곧은 신학을 할 수 있도록 민주적인 지도력으로 학교를 이끌어왔던 김재준은 이제 직접 신학교육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65년 한일 국교관계 조약체결 반대운동을 주동하는 등 점차 사회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다.


그런 시기에 학교에 들어오게 된 나는 교회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를 극복하고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촛불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 강점하 북간도의 명동교회가 내세의 구원이 아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신대가 4·19 혁명 때 함께 하지 못하고 뒷북을 친 것을 참회하고 있었다. 사회참여 신학을 가르치면서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었다. 한번은 교수회의에서 “기독교장로회가 어떻게 민주화에 기여할 것이냐?”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목사들이 먼저 민주적인 삶을 몸으로 느끼고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목사들은 가장 권위주의에 물든 집단이기도 했다. 나는 신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을 민주적으로 혁신하자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학생처장을 맡았다. 학생처장을 하던 서남동 교수가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이 왔으니까 나한테 학생처장을 맡겨야 한다고 권고했다.


나는 학생처장으로서 학생회의 민주화는 물론 캠퍼스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학원을 만들 생각을 했다. 교수들은 전적으로 찬성해 주었다. 그래서 ‘장학위원회’, ‘교과목위원회’에도 학생들이 참여 했고, 교수 부인들까지 참여해 발언할 수 있는 ‘캠퍼스생활위원회’라는 것도 만들었다. 곧 학생들의 생활 자세가 눈에 띄게 변화됐다. 캠퍼스의 삶이 그렇게 신명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민주공동체였다! 학교 안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한 학생들은 사회의 부조리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사회 민주화에 기여하고 지금도 지도적 역할을 하는 많은 한신대 출신의 인재들이 배출된 것은 이런 캠퍼스 분위기 때문이라고 나는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