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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목사 20] 암이 앗아간 공동체 기둥

by 올미랭 2019. 3. 15.

암이 앗아간 공동체 기둥 


“아기가 소파에 오줌을 쌀 수도 있지, 왜 그렇게 구박을 해요!” “왜 기껏 정돈해 놓으면 어지르기만 하는 거예요!” “내 자식 내 맘대로 가르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서로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사는 것은 예상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매주일 열리는 가족회의에서 드디어 사소한 불만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우리는 갈등을 회피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워서 잘 풀어 보자는 주의였다. 밤늦게까지 솔직히 풀어놓다 보면 신기하게도 오해가 풀리고 긴장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새벽의 집’ 식구들에게 화해의 기쁨, 하나됨의 기쁨은 종교적인 체험이었다. 우리는 ‘새벽의 집 서약’을 일년마다 새롭게 했다. 일년을 살고 힘이 들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계속 살고 싶은 식구들은 남아 있고, 해마다 식구들이 바뀌기도 했다.


새벽의 집에서는 식사 준비에서부터 설거지, 세탁, 화장실 청소까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했다. 남성들의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았다. 수요일 저녁에는 반드시 가족회의를 열어 한 주일을 평가하고 다음 할일들을 함께 계획했다.


최승국과 문혜림(내가 지어준 아내 페이의 한국이름)은 동네에서 주일학교를 열어 예수만이 아니라 지역의 다른 종교도 함께 체험했다. 초파일에는 절에 가고, 굿이 열리면 함께 구경갔다. ‘새벽의 집 유치원’와 한 많은 아낙네들을 위한 ‘장구회’ 모임도 만들었다. 수도교회 집사로 새벽의 집에 들어온 전정순은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춰서 동네 아줌마들과 잘 어울렸다. 미국인인 아내도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잘도 놀았다. 단오와 추석에는 유치원 마당에서 탈춤을 추고, 막걸리를 마시며,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줄다리기를 하면서 마을 잔치를 벌였다. 해질 무렵 돗자리 위에 돼지머리와 떡, 과일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고사를 지냈다. 빨랫골 아줌마가 제문을 읽고 나서 내가 돼지머리 앞에서 절을 하자 사람들은 “목사님이 이래도 되는 거야?” 하고 쑥덕거렸다. 나는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새벽의 집 남자들은 설거지를 하면서 때가 벗겨져 나가는 경험을 했다. 여자들은 저녁 준비를 당번제로 하면서 해방감을 맛보았다. 아이들은 가족회의에서 당당하게 말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새벽의 집 생각을 하면 여러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신명나게 피아노를 쳐 흥을 돋운 한능자, 그림쟁이 이묘자와 이종헌, 손정운과 송수미, 진연섭과 문혜숙, 김말조와 안강자, 마지막으로 새벽의 집에 결합한 김성재와 김미순, 그리고 해맑던 아이들의 얼굴까지 ….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은 최승국이다. 그는 새벽의 집 총무로 보일러를 고치는 일에서부터 아이들 용돈 챙겨주는 일까지 도맡아서 했다. 그는 늘 “그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라는 말을 했다. 가족들의 사소한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아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보았는지 이름 대신 “명철형”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한신 강단에 서던 1961년 기독교교육과 졸업반 학생이었다. 경남 출신인 그는 동서 화합을 위해 호남 출신인 김상근과 회장과 총무로 팀을 이루어 학생회를 이끌었다. 그는 선량하고 폭이 넓었으며 겸손하여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새벽의 집을 시작하게 되자 그는 이 일에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직장까지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갓 결혼해 맞이한 신부 한능자와 함께 작은 방에서 신혼생활 겸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언제부턴가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연탄가스 때문인가 싶어 동치미 국물도 마셔 보고, 한약방에도 다니고, 지압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증세는 더욱 악화돼 어느 날 걸어가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 후 76년 내가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가족들로부터 편지가 왔다. 최승국이 뇌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것이었다. 독방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느꼈던 그 충격과 슬픔은 지금도 뭐라 말할 수 없다.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 작아진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의 비문을 썼다. “너는 걸어갔다. 뒤틀리는 진통으로, 아픈 밤에 태어나, 새벽을 바라보며 꾸준히 걸어갔다 … 어린 것들과 같이 뒹굴며, 끝없는 가시밭길을 너는, 노래를 부르며 잘도 걸어갔다 ….”

그의 죽음으로 새벽의 집은 큰 기둥뿌리가 잘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