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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39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아도나이, 나의 주님이시여 엘샤다이, 전능자의 영광을 바라보나이다 가장 높으신 분, 엘 엘룐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의 샬롬을 허락하여 주시고, 저의 길을 오직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고 공급하여 주소서.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 라아, 저의 아픔을 여호와 라파의 영으로 만져 주소서. 모든 전쟁에서 여호와 닛시 의지하여 승리하게 하소서. 나의 영원하신 하나님 엘 올람, 나의 주인되신 하나님 여호와 사바옷, 나를 거룩하게 하소서. 여호와 메코디쉬켐 하나님, 이 나라를, 아시아를, 온 땅에 거룩을 나타내소서. 야훼 나의 하나님, 엘로힘 나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아멘. 2019. 11. 21.
신약성경 사복음서 비교 대조 이민교선교사님이 요청을 하셔서,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을 검색해서 문서 하나로 취합을 해 보았다. 한때 원불교에 심취하셨었던 이민교선교사님은 요한의 기록을 아주 사랑하신다. 2019. 10. 29.
사랑의 실천자, 김요석 목사 (4) 17.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어떤 축구 선수 문둥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이 생긴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병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시즌이 될 때마다 주목받던 청년이 있었다. 스무 살의 그 청년은 몸이 민첩하고 공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으며 골을 잘 넣는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는 대학축구부원에서 청소년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었고, 주요멤버로 선정될 것이 확실했다. 축구계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어느 날 연습이 끝난 후 그는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훈련을 심하게 한 탓이려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삼일 후면 통증이 가라앉겠지. 그러나 스스로 애써 안심시켰던 것과는.. 2019. 9. 24.
사랑의 실천자, 김요석 목사 (3) 12.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슬픈 이야기 서울에서 친구 하나가 영호로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주변을 산책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교회가 사들인 땅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거기에 공동묘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한국에는 돌아가신 분들을 가족의 땅에 묻는 풍습이 있어서, 시골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비석이 세워진 둥그런 무덤을 쉽게 볼 수 있다. 친구는 들판을 두루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채소밭 저편에 무덤 하나가 외롭게 솟아 있었다. 그 무덤 위로 풀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는 누가 묻혀 있는 거야? 묻힌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친구는 그 무덤에 관심을 보였다. "한번 가보겠나? 참 슬픈 일이 있었지." 우리는 풀이 무성한 곳을 지나 그 무덤 앞에 섰다. "십자가가 새겨져 있군.. 2019. 9. 24.
사랑의 실천자, 김요석 목사 (2) 7.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모두들 들일을 하러 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근처를 돌아보려고 이웃 동네 쪽으로 갔다. 한 채소밭에서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뜯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비틀린 잇몸이 부끄러웠는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고, 부처님 오셨네! 저는 항상 살아계신 부처님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디."할머니는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아닙니다."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이 말밖에는 다른 대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목사'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수가 누구다요?" 할머니는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할.. 2019. 9. 24.
사랑의 실천자, 김요석 목사 (1) 사랑의 실천자이신 김요석 목사님을 소개합니다-1 김요석 목사님은 독일에서 15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서지만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나환자 정착촌인 영호 마을의 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 글은 영호를 방문하였다가 그들의 삶에 감동한 김요석 목사님의 독일 친구인 클라우드-디터 그래스가 1991년에 독일에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0년간 영호 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아는 분이 없는 상태이기에 부득이 독일어판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중국 티벳에서 나병환자를 돌보며 선교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은 영호라는 작은.. 2019. 9. 24.
[문동환목사 29] 그런 성명 내놓고 무사하겠소? “그런 성명 내놓고 무사하겠소?” “장준하 형, 자네가 있었더라면 세상이 이렇게 어둡지 않았을 텐데….”1976년 2월의 어느 날, 형 문익환은 책상 위에 놓인 장준하의 영정을 들여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의문에 싸인 그의 죽음은 그대로 땅속에 묻혀 버린 것 같았다. 형은 신·구교가 공동으로 구성한 성서번역 위원장을 맡느라 민주화 운동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의 사진을 보며 어린 시절의 친구 윤동주도 자주 떠올렸다. “동주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그 순간 사진 속의 장준하가 “자네는? 자네는 왜 못해?”라고 말을 했다. 형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3월1일에는 뭔가 일을 벌여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펜을.. 2019. 3. 18.
[문동환목사 28] 갈릴리교회 갈릴리 교회 예수는 부활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로 갔다. 갈릴리는 예수 운동이 일어난 가난한 민중들이 사는 땅이었다. 우리들은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신학을 하는 교회를 갈릴리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갈릴리 교회는 해직 교수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모이는 교회였다. 나는 해직된 교수들이 함께 엉켜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해직교수들을 모두 우리 방학동 집으로 초대했다. 성서번역을 하느라고 학교를 떠나있던 나의 형 익환도 그 자리에 초대를 했다. 우리 집 뒷산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내가 교회를 만들자고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은 1975년 7월 17일이었다. 새벽의 집 총무인 최승국이 교섭을 해서 명동에 있는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약 20명 .. 2019. 3. 18.
[문동환목사 27] 3.1 사건 3.1 사건 1 “장준하 형, 자네가 있었더라면 세상이 이렇게 어둡지 않았을 텐데...”1976년 2월의 어느 날, 나의 형 문익환은 책상 위에 놓인 장준하의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장준하가 죽은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의문에 쌓인 그의 죽음은 그대로 땅속에 묻혀 버린 것 같았다. 긴급조치 9호가 서슬 퍼렇던 그해 겨울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의 형은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번역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민주화와 통일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장준하의 죽음을 겪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사진을 보며 어린시절의 친구 윤동주도 자주 떠올렸다. “동주야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얼.. 2019. 3. 17.
[문동환목사 26] 장준하의 죽음 장준하의 죽음내가 장준하 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75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가 포천의 약사봉에 등산을 하러 갔다가 의문의 죽음 당하기 약 한달 전이었다. 나는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를 만나러 사무실에 갔다가 그와 마주쳤다. 김관석 목사는 독일의 “Bread for the World"(전 세계에 빵을)이라는 기관에서 활동기금을 보내주곤 했는데 이를 박형규 목사가 하는 활동과 기독청년 운동에도 지원을 해주었다. 그는 이 때문에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대뜸 “문형, 잘 만났군. 백만 명 서명운동에 서명해주게.” 라며 반가워했다. 나는 “또 감옥 갈 일을 꾸미는 군.”하면서 나는 내 이름 석자를 적어 넣었다. “이번에는 좀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해.” 그는 백만 명 서명 운동을 막 .. 2019.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