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교회
예수는 부활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로 갔다. 갈릴리는 예수 운동이 일어난 가난한 민중들이 사는 땅이었다. 우리들은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신학을 하는 교회를 갈릴리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갈릴리 교회는 해직 교수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모이는 교회였다. 나는 해직된 교수들이 함께 엉켜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해직교수들을 모두 우리 방학동 집으로 초대했다. 성서번역을 하느라고 학교를 떠나있던 나의 형 익환도 그 자리에 초대를 했다. 우리 집 뒷산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내가 교회를 만들자고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은 1975년 7월 17일이었다. 새벽의 집 총무인 최승국이 교섭을 해서 명동에 있는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약 20명 정도가 모였다. 교회의 당회장으로는 기독교교회협의회의(KNCC) 첫 인권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으신 원로 이해영 목사를 모시기로 했다. 그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정도로 병마에 시달리는 분이어서 당국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해영 목사님의 설교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란 항상 세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바른 말을 할 준비요. 둘째는 감옥에 갈 준비, 셋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 해직 교수들을 보며 작으나마 나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76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돌아가셨다. 그는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3.1 사건에 올리지 않을 것을 매우 섭섭해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대성빌딩에 가 보니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대성빌딩에서는 6개월 동안 빌리기로 계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압박으로 우리에게 건물을 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명동의 한일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예배를 드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한빛 교회의 이해동 목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한빛교회에서 갈릴리 교회가 모였으면 한다는 부탁을 드렸다. 그 후 우리는 감옥에 들락날락거리면서 10.26이 터져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한빛교회에서 매주 모였다.
갈릴리 교회의 대표 설교자들은 안병무, 이우정,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과 필자였다. 이 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고, 그 외에도 함석헌 선생과 여러 다른 손님들을 청하여서 설교를 하였다. 이듬해 일어나게 되는 3.1 사건의 주역들이 다 갈릴리 교회의 설교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회가 3.1 사건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후 2시 반이 되면 교회 의자를 둥글게 놓았고, 설교자도 높은 강단에서 내려와서 설교를 하였다. 예배의 형식도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한번은 고은 스님이(시인) 오셨는데 사회자가 그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신교, 구교, 때로는 불교도 까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이문동의 판자촌에 있는 사랑방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부가 판자촌이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강제로 철거를 하자 뚝방촌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울 도심에서 날품팔이를 하면서 먹고 살았기 때문에 시외로 쫓겨 가게 되면 입에 풀칠을 하기 조차 힘들었다. 이들은 철거에 필사적으로 항거를 했다. 박형규 목사가 이끌던 서울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이곳에 들어가 교회를 세웠다. 한신대 졸업생인 이규상 전도사가 천막 안에 사랑방 교회를 맡아 오갈 데 없는 12세대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76년 1월 25일에는 갈릴리 교회와 사랑방 교회가 자매결연을 맺는 예배를 드렸다. 이곳이야 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민중의 현장이었고 이들이야 말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오클로스(민중)이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판자촌에 초라한 천막을 치고 예배를 보았지만 우리의 손을 잡는 그들의 손은 몹시도 따뜻했다. 주변에는 방위군들도 있었지만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한 겨울이었지만 천막 안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갈릴리 교회가 천막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 것이 당국을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다음주 목요 기도회에 가보니 사랑방교회로부터 급한 소식이 왔다. 천막 교회에 철거반원들이 급습을 해서 천막을 뒤엎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천막은 다 찢겨져 뒹굴고 있었고 강대상은 조각이 나 있었다. 천막에 매달려 있던 작은 나무 십자가는 똥칠이 되 채 바닥에 던져져 있었다... 교인들은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갈릴리 교회와 함께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서 한을 달래고 서로의 소식을 나누던 모임은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서 열리던 목요기도회였다. 이 기도회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때 시작되어 갈릴리 교회와 마찬가지로 10.26이 터지고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더 이상 모이지 못하게 되었다. 76년 이후에는 목요기도회도 더 이상 기독교회관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한빛교회에서 모였다. 미아리에 있는 한빛교회는 갈릴리 교회와 목요기도회 때문에 온갖 수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형사들이 늘 한빛교회 안팎에 머물면서 감시를 했기 때문에 이를 견디다 못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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