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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사랑의 실천자, 김요석 목사 (3)

by 올미랭 2019. 9. 24.

12.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슬픈 이야기  

서울에서 친구 하나가 영호로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주변을 산책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교회가 사들인 땅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거기에 공동묘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한국에는 돌아가신 분들을 가족의 땅에 묻는 풍습이 있어서, 시골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비석이 세워진 둥그런 무덤을 쉽게 볼 수 있다.
친구는 들판을 두루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채소밭 저편에 무덤 하나가 외롭게 솟아 있었다.
그 무덤 위로 풀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는 누가 묻혀 있는 거야? 묻힌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친구는 그 무덤에 관심을 보였다.
"한번 가보겠나? 참 슬픈 일이 있었지." 우리는 풀이 무성한 곳을 지나 그 무덤 앞에 섰다.

"십자가가 새겨져 있군. 자네 교회 교인이었나?" 친구가 내게 물었다.
"작년 11월에 여기에서 한 청년을 장사지냈네.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
비참한 죽음이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든."
난 친구가 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일 아침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로하신 박씨 할아버지를 자네에게 소개해 주겠네.
여기 누워 있는 청년의 아버지 되는 분이시지. 그 부부는 청년이 아기였을 때 양자로 데려왔다는군.
청년은 소록도에서 태어났는데 생모는 해산할 때 죽었지.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야.
사람들은 먼 친척집에서 아이를 거두어주길 바랐지만 친척들은 그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네.

문둥병이 워낙 무서운 병이고 아이가 정말 건강한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랬겠지.
그러다가 박씨 할아버지가 그 소식을 들은거야.
할아버지가 아내와 함께 소록도를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막 받았을 때였지.
두 사람은 그때까지 결혼을 위해 육지로 가려고 애를 쓰던 참이었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도 소록도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 사이지.

두 사람은 그 갓난아기의 사정을 듣고서는 곧장 아이를 데려왔다네.
그리고 영호로 이사해서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지. 두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거든.

아이는 자라서 학교도 잘 다니고 부모님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네.
부부는 아이에게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지. 그 아이는 아주 인기가 좋은 청년으로 자랐다네.
그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었지. 우리가 아는 그 아이는 친절하고 인정 많은 젊은이였다.
학교를 마친 청년은 군에 입대했지. 그는 어느 소도시 근방에서 군대생활을 했어.
그리고 거기서 한 아가씨와 시간을 보냈지.

그는 자랑스럽게 부모님께 도시에 사는 처녀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네.
물론 부부도 아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기뻐했네. 그들은 빨리 아가씨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초대했지.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록 오지 않는 거야. 그때마다 아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했지.
그런데 사실은 그 아가씨의 부모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마을에 가지못하게 딸을 막았던 거였네.
아가씨의 부모는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고 청년은 절망에 빠졌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짤막하게 끝나고 말았네. 두 젊은이는 같이 도망가려고 했어.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까지 아주 멀리.
그러나 아가씨의 부모는 그것을 미리 눈치채고 딸을 친척집에 보내버렸다네. 청년은 크게 상심했지.

그는 영호에 와서 부모님의 서랍에 들어 있던 문둥병 치료약을 먹어버렸어.
부모가 청년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난 후였네.

마을 사람들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네. 물론 우리는 무엇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
박씨 할아버지 내외는 우리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아들을 묻고 싶어했네. 그래서 산이 보이는 이 한적한 곳을 택한걸세."

우리는 아무말 없이 다시 영호로 돌아왔다. 한 젊은이와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13.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돌아온 아버지  

"목사님, 목사님!" 나는 그것이 정씨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우리 성가대에서 베이스를 맡아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허둥지둥 내 방에 들어왔다.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목사님, 아버지와 헤어진 지 사십 년 만에 아버지가 절 찾아오셨어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오늘 아침 갑자기 오셨어요!" 정씨는 내 팔을 잡고 나를 문까지 끌고 갔다.
"이리 오세요, 목사님. 저희 아버지를 소개해 드릴게요!"
그제서야 나는 그의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노인은 미닫이 문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었다.
그는 당황했는지 자신이 쓴 밀짚모자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거센 비바람에 주름진 구리빛 얼굴이었다.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셋은 작은 상에 둘러 앉아 수박을 먹었다. 정씨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처와 저는 여덟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이들이 좀 큰 다음에는 밭에서 열심히 저희 일을 도왔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기쁨은 얼마 안 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넷째 놈이 열두 살에 문둥병에 걸린 겁니다.
우리 식구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우선 동네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근선이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이 온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지요.
문둥병자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는 게 법이지만 저는 제 아들이 소록도에 산다는 건 꿈도 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생각했지요. 저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 근선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니 좁은 골짜기가 나오더군요.
절벽이 나오면 밀어버릴 생각이었지요. 그러면 그저 사고로 보일 테니까 . 절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마구 뛰더군요.
저는 저를 따라오고 있는 근선이를 자꾸 돌아다보았습니다. 지금 이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침내 발 밑으로 좁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아들의 어깨를 잡고 .
아니야! 내 아들을 떨어뜨릴 수는 없어. 그래, 차라리 같이 떨어져 버리자!
그런데 근선이 놈이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엄마하고 형들하고 동생들을 생각해보세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분이에요. 저 때문에 식구들을 내팽개치시면 안돼요.'
아들이 대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 식구 모두의 사랑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골짜기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아들을 바닷가까지 바래다주었지요.
작은 배 한척이 와서 아이를 소록도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저는 근선이가 죽었다고 말했어요. 사망신고까지 했지요. 근선이는 영원히 우리 앞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들들은 모두 결혼해서 대부분 고향을 떠났지요.
제 처와 저는 그때까지 건강했기 때문에 어느 아들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살던 집에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 처가 죽고 나자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럴 힘조차 없어져 버리더군요.

전 당연히 큰 아들네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라는 걸 담박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 아우네로 가보라더군요. 그래서 얼마있지 않아 짐을 꾸려 둘째 아들네로 떠났지요.

그렇지만 그 놈 집에서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늙은 아비를 기꺼이 맞아들여서
편안히 죽게 해주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저와 제 처는 오직 아들들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잘못 살았습니다.

전 처량한 마음으로 소록도에 있는 아들을 생각했지요.
그때까지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알려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 그 아이를 버린 거지요. 이 놈이 얼마나 죽일 놈인지!

저는 소록도에 가서 근선이 소식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벌써 섬을 떠나 결혼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근선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이렇게 영호에 오게된 겁니다.
사십 년이 지나서야 하나밖에 없는 진짜 아들놈한테 돌아온 거지요 . 저는 아들네 집 앞에서 오래 망설였습니다 .

근선이가 뭐라고 할까? 저는 원망만 실컷 듣고 쫓겨날 각오를 했습니다.
아비가 가장 필요할 때 저를 버렸으니, 무슨 말을 들어도 싸지 용기를 내서 오긴 왔지만
다른 아들들은 다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나 .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돌아서려는 찰나에 어떤 여자가 내다보며 친절하게 말을 걸더군요.
'할아버지, 이리 들어오세요. 누구 찾는 사람 있으세요? 아까부터 서 계신 걸 보았는데.'
그 여자는 바로 제 며늘애였습니다. 그때 외양간에서 나오던 근선이가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아들놈은 저를 끌어안고 울더군요 .

'애비는 사십 년 동안 네 소식 한 번 알아보지 않았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으냐?'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는 너무 외로웠지요. 밤마다 집 꿈을 꾸었어요.
식구들을 미워하면서, 내 운명을 원망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문둥병자이면서도 저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반발심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끌리더군요.
그 사람들은 자신을 문둥병자 이상의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들 중 한 사람과 사귀게 되었지요.

그분은 병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요.
그리고 그후로 예수님께 선물로 받은 사랑을 나에게 주었지요.
저는 그 사람들을 따라서 예배와 성경공부에 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잊게 되더라구요.
살고 싶은 마음도 생기구요. 전에는 그냥 죽고만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할 이유가 생겼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우리는 사랑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요.
그리고 어느 날 우리 꿈은 현실이 되었어요.
우리는 섬을 떠나서 결혼할 수 있었고 이곳 영호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우린 우리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요, 아버지.'

그토록 긴 세월 끝에 만난 아들이 오늘 아침에 제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손주놈들도 보여주더군요 ."
할아버지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제 할아버지는 아들과 가정을 찾았다.
집을 떠난 탕자가 돌아오듯이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14.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확성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교회탑에서 울리는 찬송가 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날 밤 나는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거센 돌풍이 집과 외양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러나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어제 저녁 느지막이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목사님, 접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 형제님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세요?"
"30분 전쯤에 택시 한 대가 옆집 나씨네 앞에 서더라구요.
그래서 창문으로 내다보니까 그집 애 택상이를 택시에 태우는 겁니다.
집사람을 불러서 '저 집에 또 뭔 일이 났나보다'고 말했지요.

택상이와 택상이 엄마가 택시를 타고 떠난 다음에 그 집 문을 두드렸더니
할머니가 열어주시는데 울어서 눈이 잔뜩 부어 있더라구요.
집안에서 나씨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게 들리데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나와서는 노모를 확 밀어제치고 제 얼굴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대는데,
나 원 참. 그러더니 '내집에서는 내 맘대로 할거니까 내버려두라구!'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겁니다.

목사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애비라는 사람이 자식을 병원에 갈 정도로 패다니, 게다가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에요.
이대로 가만이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그 집도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목사님, 나씨와 이야기 좀 해보세요. 혹시 목사님 말씀은 들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나씨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박씨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가 끊기 뒤에도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만큼 그 소식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박씨의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나씨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나씨는 작년에 큰 양계장을 짓느라고 돈을 많이 꾸어야 했다.
그러나 나씨네가 양계장 때문에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지난 주에는 왜 그리 술을 많이 마셨을까?
나씨는 내 앞에서는 자신의 어려움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새벽기도회 후에도 그저 몇 마디 인사말만 나누곤 했다.

그런데 이 집에 숨겨져 있던 불행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나씨 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단지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집 식구들이 이런 문제를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그렇게 여러 번 이야기했고 구역예배에서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 가족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돌보지 못하다니!

나는 나 자신과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가!

확성기에서 다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가 끝났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교회로 갔다.
장마철의 끈끈한 바람이 내 얼굴로 확 불어왔다.
새벽기도회에 친밀한 듯이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강대상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강대상을 올려다보며 좋은 말씀을 듣게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에 화가 났다. 새벽부터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화로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말했다. 구체적인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교회에 모인 교인들 앞에서 이 주간에는 심방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교인들을 그대로 둔 채로 나는 혼자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목사님, 어떻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그래도 그렇게 심하게 자식을 때리지는 않는다구요."

"제가 말한 사람은 형제님이 아닌데요." 우리는 두 사람 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또 있단 말씀입니까?"
"이리 들어와 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털어놓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 부딪쳤을 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 가운데 일부분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씨름해야 하는지!

이씨가 말했다.
"예배드리러 함께 모여 앉은 우리의 모습은 마치 죄의 실로 짜놓은 옷감 같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어요.
그래서 교회 밖으로 한 걸음만 나와도 다시 싸움이 시작되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 사이나 식구들 사이에서도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너무 심했어요.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하나님은 자격 없는 저를 그토록 긍휼히 대해 주셨는데
저는 아들에게 그렇게 못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그런 짓을 하게 됩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씨는 절망감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형제님, 저도 형제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근심을 내려놓았다. 이씨는 돌아갔고 내 마음도 잔잔해졌다.

그렇지만 나씨 일을 어떻게 해야 되나? 그 이튿날에는 나씨도, 그 가족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기도회에도 나오지 않았고 예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보기가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 하나 떠 올랐다. 그날 어린이 성가대 시험이 있었는데
우리는 시험을 치르는 대신 곧장 나씨 집으로 행진해 갔다.
우리는 가면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동네사람들은 우리가 대체 어디로 가는지 구경하고 있다.

"오랜만입니다. 어린이 성가대원들이 형제님을 방문하고 싶어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씨의 어두웠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알았다.
이것은 그의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특별한 방문이었던 것이다.

"어서 들어오거라!"
그는 꼬마들을 맞이했다. 금세 작은 상 몇 개가 놓이고 맛있는 떡과 참외가 차려졌다.
우리는 다시 우리와 하나가 된 나씨 집에서 먹고 울고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5.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하나님의 씨는 자란다  

"목사님, 계셔유?"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세요!"나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할머니세요? 어서 들어오세요."유씨 할머니는 고무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목사님, 어떻게 지내셔유?" 할머니는 공손하게 절을하며 내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냅니다. 여기 좀 앉으시지요." 나도 절을 하며 방석을 권했다. 할머니는 방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드리더니,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목사님, 제 안경 좀 봐주셔유. 귀 가장자리가 영 아프구만유."
"어디 볼까요?" 나는 할머니의 안경테를 약간 구부려서 간격을 넓혀드렸다.
"이제 한번 써보세요." 안경은 편하게 잘 맞았다. 할머니는 수줍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이구, 목사님이 여기 안 계셨더라면 어쨌을까 몰러!"
할머니는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고 없는 두 손을 무릎 사이에 감추었다.  
"목사님, 절대 여기를 떠나지 마셔유. 목사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죄다 목자없는 양떼가 되버릴 거구만유."

할머니가 이렇게 부탁하시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문둥병에 걸린 후부터 여든일곱이 된 지금까지 미움과 배척만 당해 왔던 것이다.
할머니의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소에 궁금히 여기던 것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알게 된 것도 벌써 몇 년이 되었네요. 한 가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그러믄유."
"할머니는 언제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 할머니는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가 스물두 살 때 어떤 일본 목사님의 전도를 받았구만유.
그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할라치면 일본 사람들이 목사님을 내몰곤 했지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못할 짓도 많이 했지만 그 목사님은 참말로 좋은 분이였시유.
일본 군인이 못된 짓을 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셨지유." 할머니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는 먹을 것이 귀했지유. 쌀은 구경하기도 힘들었으니까유. 그때 생각하면 요즘은 진짜 좋은 시상이지유."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떤 일본 목사님 한 분이 오래 전에 이 할머니의 마음에 하나님의 씨를 뿌렸구나.
지금 할머니는 나이든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든 영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으로 존경받는 분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침 10시만 되면 교회에 기도하러 가기 위해 작은 집을 나선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인 양 가슴에 품고 오래오래 기도하신다.

요즘 우리는 사오십 명 가량의 노인들을 보살필 수 있는 양로원을 세우려고 한다.
문둥병이든 노인들은 돌보아줄 가족 하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목돈이 없이도 일을 시작해줄 건축 회사를 찾고 있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영호에서는 하나님의 씨가 자라고 있다. 척박한 토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매일 새벽 4시에 새벽기도회로 모인다. 이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이다.
형제 한 분과 자매 한 분이 기도하고 나면 보통 내가 설교를 한다. 물론 찬송도 한다. 겨울에는 찬송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 교회에는 난방시설이 없는데 힘차게 찬송을 하면 몸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교인들이 새벽기도회에 온다.
이제 그들은 새벽기도회를 빼놓은 하루 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이틀에 한 번씩 학생 성가대가 찬양을 드린다.
학생들은 영한대역 성경을 보면서 성경구절을 외운다.

주일 아침이면 어린이예배를 먼저 드리고 11시에 대예배를 드린다.
남녀 성가대원들이 멋있는 가운을 입고 매주 찬양을 드린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벌써 꽉 차 버린다.
우리 교회에는 의자가 없기 때문에 모두들 방석을 깔고 앉는다.
시간이 되면 교회탑에 설치한 확성기로 녹음된 찬송가가 울려퍼진다. 그것이 교회종을 대신해준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종의 '희망곡'을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부르고 싶은 찬송가 장수를 큰 소리로 말하면 반주자와 성가대가 선창한다.

교인들 대부분은 2시 오후예배에 참석하고 예배가 끝나면 구역별 성경퀴즈대회를 연다.
이렇게 매주 점수를 매겨서 연말에 합산하고, 그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구역에게 상을 준다.
주일 저녁에는 청년예배가 있다. 이 예배 때에는 전도사님이 설교를 한다.
교회에 이렇게 집회가 많은데도 내가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은 내 곁에 동역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등 여러 분들이 교회를 섬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남녀노소 할것없이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뿌리신 씨를 거두는 사람들이다.
평일에는 일터에 나가서 각자 일을 하지만 저녁 시간과 주일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따로 떼어 놓는다.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재미있는 행사가 있다.
성경암송대회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우는 암송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암송왕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할 뿐 아니라 이 행사를 아주 재미있어 한다.

수요일 저녁에는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를 한다. 또 목요일 저녁에는 자매들의 모임이 있다.
집사님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좋겠다.
부인들은 우리 동네에 사는 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고, 각자 할 일을 분담한다.
금요일에는 다섯 가정씩 한구역으로 모여 구역예배를 드린다.
구역은 우리 교회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초단위이다.

영호 사람들에게 교회는 두말할 나위없이 중요한 존재이다.
그들은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하나됨'을 교회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호도 많이 변했다. 낡은 초가집들이 헐리고 새 집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밭일뿐 아니라 양돈 사업도 한다.
"우리 자식들은 우리보다 잘 살아야지요."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 지붕에 올라가 석양빛에 빛나는 우리 마을을 보면서
이곳을 이 세상 어느 곳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씨가 자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들판이 있는 것이다.





16.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한다.
흔히 가족들 중에 교회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서 교회에서 들은 하나님 이야기나 예수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열심이 대단한 선교사인 셈이다. 아이들은 이웃 동네에 가서도 선교사 노릇을 한다.

영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때의 놀라운 일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몇 주 전부터 교회 아이들은 동네 방네 다니면서 말했다.

"얼마 있으면 예수님 생일인데 그때 생일잔치를 할거야. 목사님이 우리를 전부 초대하신대!"
그 말을 들은 이웃 동네 아이들은 귀가 번쩍 뜨였다.
"먹을 것도 주냐? 부처님 오신 날에는 떡을 받았는데."
아이들은 친구들의 요구를 척척 받아주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나팔을 불었다. "우리 목사님 말씀이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대. 그러니까 예수님 생일에는 우리 모두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문에 번번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그렇게 많은 쌀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인가?  

12월 24일은 무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먹을 것을 아끼고 아껴서 쌀 반 자루는 어떻게 마련했지만, 그것말고는 쌀 한 톨도 얻지 못했다.
첫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맞이해야 하다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공기에 밥을 가득 담아 쪼르륵 소리나는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너무 배가 불러서 아무 말도 못할 정도로 실컷 먹게 해줄 수만 있다면 .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되었다. 어른 아이 할것없이 예배당에 빽빽이 끼어 앉았다.
방석은 벌써 다 동이 난 지 오래였다. 세 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극, 합창, 성탄절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어른과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영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그것은 그야말로 생일잔치였다! 그러나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분명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의 얼굴에서도 푸짐한 생일상의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대"하고 말할 때
"하지만 목사님은 그렇지 못해"라는 말을 빠뜨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웃 동네 아이들은 예상보다 많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내 신학 속의 예수님은 과연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  

나는 뜨거운 감자를 뱉어버리듯이 내 고민을 밀어내버렸다.
먹든지 말든지, 결국 예수님 생일이니까 난 모르겠다. 잔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예배를 마치면서 나는 짧지만 분명한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는 저녁에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듯이 조용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아니면 몇 분? 내게는 영원처럼 아득한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서 있었는데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나를 보고서는 교회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쌀을 세 가마니 가져왔는데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감사의 말이 튀어나왔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내 말에 아멘으로 응답했다.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 계실까?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나를 깨웠다.  

"서울에서 오는 길입니다. 홍콩에서 주문한 기계가 서울로 왔거든요.
목사님, 홍콩에 있는 제 친구 아시지요?
그 친구가 목사님과 목사님 교회에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하면서 이 쌀을 살 돈을 보냈습니다.
마침 사업상의 일로 이 근방에 올 일이 있어서 가져왔지요.
쌀이 택시 트렁크 안에 있는데, 누가 좀 옮기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말문이 동시에 열렸다. 모두들 기쁨에 넘친 나머지 작은 교회당이 들썩들썩 했다.  
정말 놀라운 크리스마스였다!  

박 장로님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
그 집 아궁이가 동네에서 가장 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밥공기와 수저를 챙기려고 집으로 달음질쳤다.
예배당 바닥에는 서둘러 작은 잔칫상이 차려졌다.   

한 시간후,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잔칫상에 둘러 앉았다. 공기에 소복이 담긴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리 아이들은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서 마구 으시대며 신바람을 냈다.
그리고 행여나 이웃 동네 아이들에게 질까 싶어서 밥그릇을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