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신학40 [문동환 목사 10] 공산당 압제로 만주를 떠나다 공산당 압제로 만주를 떠나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해방이었으나 용정은 곧바로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한 중국 교회 청년 80명이 몽둥이를 들고 용정의 치안을 맡기도 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삼팔선이 그어져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비극이 시작됐다. 용정에 있던 기독교 청년들은 그동안 만주 정부에 빼앗겼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를 되찾기로 결의했다. 나는 장윤철 선생을 교장으로 모시고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명신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장윤철 선생은 은진 6회 졸업생으로 명신 재건을 주동했다. 서울에 와서는 대광중·고등학교 교감과 신일고등학교 교장으로 평생 청빈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얼떨결에 맡은 국어 과목이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기에 열심히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 2019. 3. 10. [문동환 목사 09] 이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다 이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다. 만보산에서 용정으로 돌아온 나는 용정 중앙교회를 섬기면서 주일학교 갱신에 전념했다. 그때 중앙교회에는 피난 삼아 정대위 목사가 부목사로 와 있었다. 그는 명동교회의 교사이던 정재면 목사의 아들로, 후에 한신대 교수와 건국대 총장을 지냈으며, 캐나다로 이민해 오타와 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전택완 장로가 주일학교 교장이었는데 젊은이들을 절대적으로 옹호해 주고 이해력이 많은 분이었다. 그는 교회 앞에서 사진관을 해서 늘 우리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 때 그 사진을 한 장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참으로 섭섭하다. 후에 서울에 와서도 나는 전 장로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모시고 성남교회에서 일을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박문환 형은 특히 만돌린 연주를 잘했다. 그의 아버지가 여.. 2019. 3. 10. [문동환 목사 08] 일본서 날아온 윤동주의 부음 1945년 3월6일 용정의 집에서 치러진 윤동주의 장례식. 영정 사진 왼쪽이 집례를 한 문재린 목사, 오른쪽으로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 아버지 영석, 동생 일주씨 3대가 서 있다.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943년 일제의 학병 징발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입학했던 봉천 신학교를 한 학기 만에 그만둔 형과 나는 만보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신경(장춘)에서도 걸어서 몇 십 리를 더 가야 하는 오지였다. 전라도에서 일제의 탄압과 가난에 쫓겨 온 빈농들이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해 2월부터 형은 만보산교회의 전도사로, 나는 소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일본에서 장준하 형이 결혼을 결심하도록 옆에서 조언을 했던 나는, 44년 6월 익환 형과 박용길 형수의 결혼이 성사되는 데도 결정적인 .. 2019. 3. 10. [문동환 목사 07] 꿈에 그리던 일본신학교 입학 일본신학교 유학시절인 1940년 한 살 아래로 청산학원에 다니고 있던 안병무(맨오른쪽)와 함께 한 필자(가운데).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나는 아버지 몰래 신학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했다. 일본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주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때 나는 훗날 서울에서 종로서적을 경영하는 장하구 형과 같이 자취를 했다. 장형은 상지대학 독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책상에 엎드려서 기도를 드렸는데,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신실한 분이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신쥬쿠라는 곳에 있는 한인교회에 같이 다니면서 내가 신학교에 입학해 갈라질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고마운 편지가 날아왔다. 용정 중앙교회에서 내게 장학금을 대주기로 했으니 원하는 신학 공부를 마음껏 하라는 것이었다. .. 2019. 3. 10. [문동환 목사 06] 일본 공대 유학 압박에 일단은 » 1938년 용정 은진중학교 17회 졸업생들과 찍은 기념사진. 맨 뒷줄 오른쪽이 필자(문동환), 가운데 양복 차림이 담임 채우병 선생, 셋째 줄 맨 왼쪽이 강원룡 목사다.나에게는 세 살 아래 동생 두환이가 있었다. 두환이는 네모반듯하게 생긴데다 할머니(박정애)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기세가 등등했다. 주일학교에서도 어찌나 까부는지 형과 나는 두환이를 따돌리곤 했다. 한번은 내가 집 앞의 무성해진 풀을 베어 장에 내다 팔려는데 두환이가 리어카를 앞에서 끌며 같이 갔다. 가는 길에 한 중국인이 풀을 사겠다며 자기네 마굿간으로 갖다 달라고 해서 둘은 신이 나서 갔다. 그리고는 8전을 받았다. 내가 3전만 줬더니 두환이는 똑같이 나눠야 한다고 떼를 썼다.얼마 뒤 동생은 뇌막염으로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 2019. 3. 10. [문동환 목사 05] '평생 스승' 김재준 목사를 만나다 » 1937년 5월14일 은진중학교 봄 소풍 때 북간도 명동촌 입구의 선바위 정상에서 장공 김재준(뒷줄 양복 차림 두 사람 중 오른쪽) 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선바위는 당시 용정 일대에서 최고 명소로 꼽히던 원족 장소의 하나였다. 김재홍씨 제공 북간도 용정의 미션 스쿨인 은진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 내 평생의 스승인 장공 김재준 목사(1901~1987)를 처음 만났다. 김재준 목사는 평양의 숭인상업학교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사표를 낸 뒤 막막한 실직 상태에 있었다. 그때 마우리 선교사의 소개와 학교 이사장이었던 나의 아버지 문재린의 강력한 추천으로 은진의 교목이자 성경 교사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6살 아래인 그를 같은 함경도(경흥) 출신이기도 해서 유학시절부터 알고 지냈다.그는 수줍음이 많은 성품이어서.. 2019. 3. 10. [문동환 목사 04] 용정의 농구광에 운동금지 불호령 » 용정의 은진중학교 시절 운동에 빠져 있던 필자(맨 오른쪽)는 탁구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사진은 김약연 목사의 증손자인 김재홍씨가 소장하고 있는 ‘1938년 17회 졸업앨범’에 실린 것이다.여섯 살 나던 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었다. 낮부터 펑펑 내린 눈이 내 허벅지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교회에 가는 길에 나는 “내가 눈길을 열겠슴둥” 하며 선뜻 나섰다. 아주머니들은 내가 귀여웠는지 “동환아, 너는 커서 무엇이 되겠니?” 물었다. 난 아무런 주저 없이 “난 목사가 되겠슴둥”이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목사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결심은 그날 이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때 이미 내 마음에는 어린 눈에도 한없이 위대해 보였던 김약연 명동교회 목사.. 2019. 3. 10. [문동환 목사 03] 80년전 캐나다로 유학간 아버지 »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11월부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뉴칼리지에서 6개월간 연구하던 시절 아버지 문재린이 그 지역 전통의상인 킬트에 백파이프를 들고 찍은 기념사진. 36살 때 모습이다.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그날 어머니 김신묵은 30리나 되는 용정까지 걸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새벽밥을 해 먹고 길을 나서 종일 굶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셨다고 했다. 아버지 문재린도 북간도에서 제일 큰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지회 서기직을 맡았고, 기자 일을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열기는 높아갔지만 일제의 탄압도 더욱 거세어졌다. 이듬해(경신년) 토벌에는 일제가 노루바위라는 곳의 교회당에 교인들을 집어넣고 통째로 불을 .. 2019. 3. 10. [문동환목사 02] 잘생기고 착한 형 익환 » 1930년대 명동촌 동거우의 집에서 찍은 가장 오래된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13살 때 병사한 동생 두환, 동환(필자), 어머니 김신묵, 할머니 박정애, 맏형 익환, 여동생 선희.‘작문시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동학교는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을 했다. 내 아버지 문재린은 1913년 명동중학교를, 어머니 김신묵도 그 이듬해 명동여학교를 졸업했다.어릴 때 남몰래 혼자서 한글을 깨우쳤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혼한 뒤 시아버지가 보내주어 여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곳에서 아명인 ‘고만녜’를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어머니의 담임은 신간회에서 간도 교육의 사명을 받고 온 정재면 선생이었다. 그때 명동학.. 2019. 3. 10. [문동환목사 01]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동을 타고나다 출처: http://cafe.daum.net/moontonghwan/HibI/1 길을찾아서] ‘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명을 타고나다떠돌이 목자의 노래1» 나의 아버지 문재린(기린갑이·왼쪽)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고만녜·오른쪽) 권사 부부, 1951년 제주도 피난시절 모습이다.19세기가 저물어가는 1899년 2월18일 새벽 다섯 살 고만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 30대 후반의 동학도이자 실학자였던 아버지 김하규의 식솔을 비롯해 김해 김씨 가문 63명은 이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살을 여미는 바람을 뺨에 맞으며 고향 회령을 떠나 북간도로 향했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며 고만녜가 자꾸 넘어지자, 우차를 몰던 김하규는 고삐를 큰아들 진묵에게 넘겨주고, 넷째딸을 자신의 짐 위에 앉혔다. 고만녜는 “아바.. 2019. 3. 10.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