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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40

[문동환목사 26] 장준하의 죽음 장준하의 죽음내가 장준하 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75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가 포천의 약사봉에 등산을 하러 갔다가 의문의 죽음 당하기 약 한달 전이었다. 나는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를 만나러 사무실에 갔다가 그와 마주쳤다. 김관석 목사는 독일의 “Bread for the World"(전 세계에 빵을)이라는 기관에서 활동기금을 보내주곤 했는데 이를 박형규 목사가 하는 활동과 기독청년 운동에도 지원을 해주었다. 그는 이 때문에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대뜸 “문형, 잘 만났군. 백만 명 서명운동에 서명해주게.” 라며 반가워했다. 나는 “또 감옥 갈 일을 꾸미는 군.”하면서 나는 내 이름 석자를 적어 넣었다. “이번에는 좀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해.” 그는 백만 명 서명 운동을 막 .. 2019. 3. 17.
[문동환목사 25] 해직 교수들 ‘민중 십자가’ 지다 해직 교수들 ‘민중 십자가’ 지다 예수는 부활하자마자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갔다. 갈릴리는 예수 운동이 일어난 가난한 민중들이 사는 땅이었다. 우리들은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신학을 하는 교회를 ‘갈릴리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갈릴리 교회는 해직 교수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세운 ‘예배당 없는 교회’였다. 함께 뭉쳐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날 해직교수들을 모두 방학동 우리집으로 초대했다. 성서 번역을 하느라고 한신대를 떠나 있던 형 익환도 함께한 그 자리에서 나는 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은 1975년 7월17일이었다. 새벽의 집 총무인 최승국이 교섭을 해서 명동에 있는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20명 정도가 모였다. 당회장으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9. 3. 15.
[문동환목사 24] 해직 교수, 울 시간이 없었다 해직 교수, 울 시간이 없었다 1975년 월남이 공산화하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지금까지의 긴급조치 가운데 가장 살벌한 ‘긴조 9호’를 발동시켰다. 특히 이 9호에서는, 개헌논의 금지, 학생 정치 관여 불용, 그리고 경찰병력 교내 진입을 합법화하고 있었다. 4월10일에는 문교부에서 휴업령을 내려 전국의 모든 대학 교문이 굳게 닫혔다. 교직원 외에는 아무도 학교에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운동권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기세로 문교부는 우리 한신대 학생 10명의 제적과 함께 안병무와 나의 해임을 명령했다.‘기장’을 대표하는 장로들과 총회장이 긴급 소집을 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증경(전임) 총회장과 강원룡 목사가 포함된 9인 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하기로 했다. 위원회에서는 폐교까지.. 2019. 3. 15.
[문동환목사 23] ‘삭발 학장’이 찢어버린 대학교기 ‘삭발 학장’이 찢어버린 대학교기 1972년 10월17일 대통령 박정희는 기어코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유신독재의 시작이었다. 대학 휴교령과 학생 제적, 강제 징집, 서클 해체 등으로 학생운동은 꽁꽁 얼어붙었다. 1년 가까운 침묵 끝에 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유신철폐 데모가 터졌다. 한신대에서도 이창식 학생회장과 대의원 의장 김성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 양심상 안이하게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학생들이 11월9일부터 열흘 동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채플실에서 예배와 토론으로 신앙적인 결단과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한 이론적인 무장을 계속했다. 우리 교수들도 강의를 할 수가 없으니 날마다 교수 회의실에 모여서 아침 기도회를 열고는 덕담이나 나누면.. 2019. 3. 15.
[문동환목사 22] 4·19 혁명에 불참한 ‘한신’의 반성 4·19 혁명에 불참한 ‘한신’의 반성 우리 둘이 결혼에 골인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늘 주장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박형규 목사. 내 아내 페이가 방학에 잠시 한국에 나왔던 1961년 여름, 나는 박형규 목사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풋풋하고 열정이 넘치는 목사로 마포교회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경상도 지역 주일학교 교사강습회에 강사로 참석하면서 친해졌다. 강습회를 마치고 부산의 동래 온천탕에 발가벗고 앉아 나는 그에게 결혼에 대한 내 고민을 얘기했다. 박 목사도 사랑한다면 당연히 결혼을 하라고 권했다. 이후 그는 나의 아내를 만날 때마다 자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박 목사와 교류하면서 나는 그가 시작한 수도권 특수지.. 2019. 3. 15.
[문동환목사 21] 인혁당 주검 앞 "형제는 용감했다" 인혁당 주검앞 “형제는 용감했다” “처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데 애매한 사람의 목에 밧줄이 걸렸습니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 1975년 4월9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여덟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목요기도회 날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5가로 가던 중 라디오에서 그날 새벽에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가족과 면회할 시간도 주지 않고,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집행을 했단 말인가!’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 격정의 심정으로 강단에 올랐다. 내 설교는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그날 나는 18장에 있는 ‘억울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억울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2019. 3. 15.
[문동환목사 20] 암이 앗아간 공동체 기둥 암이 앗아간 공동체 기둥 “아기가 소파에 오줌을 쌀 수도 있지, 왜 그렇게 구박을 해요!” “왜 기껏 정돈해 놓으면 어지르기만 하는 거예요!” “내 자식 내 맘대로 가르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서로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사는 것은 예상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매주일 열리는 가족회의에서 드디어 사소한 불만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우리는 갈등을 회피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워서 잘 풀어 보자는 주의였다. 밤늦게까지 솔직히 풀어놓다 보면 신기하게도 오해가 풀리고 긴장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새벽의 집’ 식구들에게 화해의 기쁨, 하나됨의 기쁨은 종교적인 체험이었다. 우리는 ‘새벽의 집 서약’을 일년마다 새롭게 했다. 일년을.. 2019. 3. 15.
[문동환목사 19] 교인들 닥달에 ‘한솥밥’ 먹다 교인들 닥달에 ‘한솥밥’ 먹다 “목사님, 말로만 공동체, 공동체 하면 뭐 합니까?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1971년 11월 어느 월요일, 수도교회의 최승국 청년회장 등 교인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쳐 나를 닦달했다. 바로 전날 주일예배 때 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공동체 운동에 대해 소개했다. 이들이 그 설교를 듣고 찾아와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책임지라고 나에게 도전한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을 비롯해 다섯 가족 15명 정도가 참가한 공동체인 ‘새벽의 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참 묘했다. 내가 의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 말 독일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의 를 읽었다. 산업사회가 개인주의, 물질주의, 권위주의로 인해 .. 2019. 3. 15.
[문동환목사 18] 61 년 부산항에서 만난 서양 신부 61 년 부산항에서 만난 서양 신부 1961년 봄 나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왔다.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페이는 그해 여름 서울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에 자원봉사자로, 여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왔다.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한국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수유리에 있는 한신대 캠퍼스를 보여주고 가족에게 소개를 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며느리를 기다려왔는데 말도 안 통하는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며 서운해하셨다. 우리 둘은 김재준 목사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하기도 했다. 목사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둘이 서로 사랑해?” 하고 물으셨다. 우리가 그렇다고 하자 “사랑하면 결혼하는 것이지”라고 툭 던지셨다. 그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그의 한마디는 찌는 듯한 여름에 불어오는 한 자락 바람처럼 시원했다.. 2019. 3. 15.
루터의 종교개혁은 맥주 덕분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맥주 덕분이다?![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⑤]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2015.10.08 10:28:18가 + 가 - "책은 고통을 주지만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영원한 것은 맥주뿐!" 괴테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후의 명작을 쓴 대문호도 독서보다 맥주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의 그림 속 농민들의 결혼식과 축제 장면에는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와인이 귀족과 부자들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평등의 술'이었습니다. 맥주의 역사를 더듬으면 유럽 근·현대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사회 경제사적인 의미가 보입니다. 나치 독일을 이끈.. 2019.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