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성명 내놓고 무사하겠소?”
“장준하 형, 자네가 있었더라면 세상이 이렇게 어둡지 않았을 텐데….”
1976년 2월의 어느 날, 형 문익환은 책상 위에 놓인 장준하의 영정을 들여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의문에 싸인 그의 죽음은 그대로 땅속에 묻혀 버린 것 같았다. 형은 신·구교가 공동으로 구성한 성서번역 위원장을 맡느라 민주화 운동에는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의 사진을 보며 어린 시절의 친구 윤동주도 자주 떠올렸다. “동주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그 순간 사진 속의 장준하가 “자네는? 자네는 왜 못해?”라고 말을 했다. 형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3월1일에는 뭔가 일을 벌여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펜을 들어 ‘민주구국선언문’의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70년대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최대 재야운동 사건은 그렇게 촉발됐다.
형은 그렇게 작성한 초안을 들고 나에게 찾아와 보여주었다. 나는 몇 가지 제안을 한 뒤 경제에 관한 것은 이문영 교수에게 의논을 하라고 했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미리 의논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즈음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 역시 3·1절을 맞아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고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형은 김대중씨와 함께 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당시 가택연금 상태로 삼엄한 경계 속에 지내던 김대중씨와는 나의 제자이자 나중에 새벽의 집에 들어와서 함께 살게 된 김성재(한신대 교수·전 문화관광부 장관)가 연락책을 맡았다. 암호는 ‘한복’이었다. “한복이 다 됐다”는 전화를 받으면 김성재는 김대중씨의 처제인 ‘목동 이모’(이희호씨의 동생) 집으로 가서 선언서 초안을 받아서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익환 형은 좀더 명확하게 쓰자고 했고, 김 선생이 보기에 우리의 초안은 너무 강경하다고 해서 서너 번에 걸쳐서 의견 조정을 했다.
나는 70년대 초반부터 함세웅, 김승훈, 신현봉, 문정현 신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유신 정권에 신·구교가 함께 맞서자고 의기투합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신부들은 주교의 승낙이 없이는 성명서에 서명을 할 수 없다며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봉원동의 정일형 박사와 이태영 변호사 부부도 서명을 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갈릴리교회의 동지들에게는 뒤늦게 알렸다. 그러나 정작 이 일의 주동자였던 형의 이름은 성명서에서 빼고, 모두들 사실을 밝히지 않기로 입을 맞췄다. 성서 번역의 마지막 원고 정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주구국선언문에 서명한 이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이태영, 이우정,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윤반응, 문동환, 김지하 등이었다.
드디어 3월1일 저녁, 사람들로 가득 찬 명동성당 강당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3·1절 기념 미사가 끝난 뒤 신·구교가 같이 하는 기도회에서 나는 짧게 설교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족의 지도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후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높이 찬양을 받았다. 그러므로 박정희도 이 시점에서 물러선다면 한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 인물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자신의 앞날을 위해 권좌에서 용퇴하라고 충고를 했다. 설교를 하는 나도 흥분했지만 청중들도 굉장히 흥분을 했다. 뒤를 이어 이우정 교수가 나와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작은 키의 이 교수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선언문을 낭독하자 청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모임을 기도회라고 생각했지 ‘긴조 9호’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자리인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도회가 끝나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종로 기독교회관을 들락거리던 중앙정보부원이 내 옆으로 와서는 “문 박사님, 그런 성명을 발표하고도 무사할 줄 아십니까?”라고 경고를 하고 사라졌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이젠 정말 교도소 생활을 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밤, 근처 방학동에서 ‘독신여성 공동체’를 꾸려 살고 있던 이우정 선생 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달려와 말했다. “이 선생님이 끌려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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