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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12] 종교재판을 받은 진보신학

by 올미랭 2019. 3. 10.

종교재판을 받은 진보신학 


형과 내가 1946년부터 일년 동안 다닌 서울 동자동 조선신학교는 1940년 세워졌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은 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목사 훈련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김대현 장로가 일본 경찰의 미움과 감시를 각오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치며 송창근과 김재준에게 학교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을 수 없어서 조선신학원으로 시작을 했는데 신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었다. 막바지에는 학생들이 평양 군수공장에서 집단노동을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김재준 목사는 교장이자 교수, 경리이자 소사로서 끝까지 조선신학교를 지켰다.

해방이 되자 김재준과 송창근, 한경직 목사는 서울에 모여 프린스턴에서 꿈꾸었던 새로운 신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때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한 신학교였기 때문에 평양신학교에 다녔던 학생들도 공부를 하러 왔다. 그들은 평양에서 들었던 보수적인 강의와는 사뭇 다른 김재준 목사와 캐나다 선교사인 서고도(윌리엄 스콧)의 강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성서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말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육체 부활 등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서구의 신학을 소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문맥을 무시한 채, 그 내용만을 수집해서 김재준과 서고도를 이단자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고발하였다. 김재준은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혀야 하는 현대판 종교재판을 받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학생회에서도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학생회장이던 이해영(성남교회 목사, 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하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 학생들을 세 가지 점에서 비판했다. 첫째, 김재준 목사는 여러 가지 학설을 소개했을 뿐인데 그의 주장이라고 말한 점이다. 둘째는 수업 내용에 의문이 가면 교수에게 직접 질문을 해서 설명을 들어야 했는데 그런 확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총회에 고발부터 한 점이다. 셋째는 그래도 문제가 된다면 학생회에서 충분히 의견을 모아야 하는데 곧바로 심각한 행동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반성하고 고소를 취하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이에 해당 학생들이 나름대로 변호를 하자 다시 익환 형이 일어서서 재비판을 했다.


지혜로운 교회 정치가였던 송창근 박사는 김재준에게 완곡한 사과의 글을 쓸 것을 권하면서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수습하려고 했다. 그는 여러 지도자를 만나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를 거부하고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글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당당히 밝혔다. 나는 15장에 이르는 그의 변증서를 등사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이 신앙적 양심과 학문 연구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고, 한국의 목사들을 학문 이전의 ‘성경학교 수준’에 매어 놓게 된다고 썼다. 그는 한국 개신교회도 이제 당당히 세계적 신학의 본류와 교류하며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조용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자 우리는 다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자네들도 나중에 목회를 해 봐. 장로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네” 하는 것이 아닌가. 평안도에서 내려온 보수적인 장로들이 반대를 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로 인해 소원해졌다. 그러나 65년 일어난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운동’에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영락교회에서 집회를 열어 신앙의 동지로 다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서고도 목사는 교회사를 강의하면서 종종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이것을 문제 삼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인으로 영시문학에도 능했다. 이 논쟁은 6·25전쟁 기간에도 지속되다가 53년 장로회 총회에서 최후의 판결이 내려졌다. 두 사람을 이단으로 단죄한 것이다. 김재준 목사는 파문되고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에서 명칭 변경) 졸업생은 목사가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들을 지지했던 진보적인 목사들을 중심으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교단을 세우게 된 것이 지금의 기독교 장로회인 것이다.


총회 고발사건 당시 나와 형은 한경직 목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한 목사는 당시 베다니교회(지금의 영락교회)를 맡았는데 평안북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몰려와 크게 번성했다. 한 목사는 “염려하지 말아. 내가 해결할 테니…” 하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 후 얼마가 지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우리는 다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자네들도 나중에 목회를 해 봐. 장로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네” 하는 것이 아닌가. 평안도에서 내려온 보수적인 장로들이 반대를 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로 인해 소원해졌다. 그러나 65년 일어난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운동’에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영락교회에서 집회를 열어 신앙의 동지로 다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