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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14] 진보 개신교의 밀알 복음동지회

by 올미랭 2019. 3. 10.

진보 개신교의 밀알 복음동지회 


만주를 떠난 이후 뿌리 뽑힌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 동료들이 있었다. 1948~49년 대광 중고등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나는 유관우·유제선·박봉랑·김관석과 자주 어울렸다. 유관우 형은 원래 신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건축사업을 해 생활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박봉랑·김관석·백리언·김철손은 42년 동경신학대학 예과에 함께 입학한 동기들이다. 우리 다섯은 일본 학생들보다 모두 키가 커서 교실 뒷줄에 나란히 앉아 분위기를 압도했다. 나는 특히 박봉랑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김관석은 7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로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들은 해방 후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모임을 만들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했다. ‘복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48년 1월12일 종로6가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모임 이름에서 복음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를 번역한 것으로 진보적인 개신교를 뜻하는 것이었다. 창립 당시 회원은 장하구·홍태현·김철손·이시억·문익환·문동환·지동식·이영헌·김덕준·박봉랑·김관석·장준하·유관우, 이렇게 13명이었다. 형 익환은 창립 회원이긴 했지만 곧 유학을 떠나 초기 활동은 많이 하지 못했다.


우리들은 새로 펼쳐질 세상에서 동지적인 친교를 나누며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고 확산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일은 참으로 소박했다. 전도지를 만들어 전차 안에서 옆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극장에 광고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스도에게 빨리 돌아오라! 하느님의 의가 서지 못하는 곳에 정당한 양심이 없다. 양심을 잃은 그 세기, 사회, 민족은 영원히 죽음, 죽음뿐이리라 … 그대는 조국을 염려하는가?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사실 단순한 초청 글이었으나 당시 우리들은 퍽이나 진지한 심정이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김재준 목사도 뜻있는 모임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분열과 교권 싸움으로 시끄러웠던 교계에서 이렇게 초교파적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객지에서 발붙일 곳을 찾기 힘들었던 우리 형제는 이 모임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에 정을 붙여 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복음동지회도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잠시 정지되었고, 나 역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다 형이 55년 프린스턴에서 구약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복음동지회에 참여하면서 모임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각자 전공과 교단이 다른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모임에 나왔다. 연세대의 박대선(그의 집이 넓어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윤성범·김철손·김용옥, 연세대 신학대학의 김정준·김찬국·백리언·문상희·유동식, 한국신학대학의 이장식·전경연·이여진, 장신대학의 박창환·이영헌, 루터교의 지원용, 중앙신학대의 안병무·홍태현, 대전 감신대의 이호운, 이화여대 교목인 이병섭, 기독교청년회(YMCA)의 전택부, 기독교 서회의 조선출, 잡지 <사상계>의 장준하, 대광 중고등학교의 장윤철, 종로서적의 장하구 등이 회원이었다.

우리는 세계의 진보적인 신학 책을 선정해 ‘임마누엘 복음주의 총서’로 펴냈다.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인의 생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같은 책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해마다 신학 강좌를 열었으며 성서를 오늘의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도 계획했다. 그때까지성서는 선교사들이 오래전에 번역을 한 까닭에 젊은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고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구약 번역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형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복음동지회에서는 부인들과 함께 자주 친교 모임을 했다. 그때마다 윤성범 교수가 농담으로 모두를 웃기곤 했다. 그러나 72년 유신헌법이 발표되고 시국이 얼어붙으면서 이 모임은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회원들마다 독재에 대처하는 자세에 차이가 있기도 했다. 또 나를 비롯한 여러 회원들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면서 틈을 내기가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