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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09] 이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다

by 올미랭 2019. 3. 10.

이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다.


만보산에서 용정으로 돌아온 나는 용정 중앙교회를 섬기면서 주일학교 갱신에 전념했다. 그때 중앙교회에는 피난 삼아 정대위 목사가 부목사로 와 있었다. 그는 명동교회의 교사이던 정재면 목사의 아들로, 후에 한신대 교수와 건국대 총장을 지냈으며, 캐나다로 이민해 오타와 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전택완 장로가 주일학교 교장이었는데 젊은이들을 절대적으로 옹호해 주고 이해력이 많은 분이었다. 그는 교회 앞에서 사진관을 해서 늘 우리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 때 그 사진을 한 장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참으로 섭섭하다. 후에 서울에 와서도 나는 전 장로를 주일학교 교장으로 모시고 성남교회에서 일을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박문환 형은 특히 만돌린 연주를 잘했다. 그의 아버지가 여관을 해서 빈방에 모여 앉아 만돌린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은진중학교 음악교사였던 박창해 선생은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강의 내용을 등사해서 교수 자료를 만들면서 문법학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해방 후 군정하에서 한글 교과서 편찬에 참여했고, 후에 연세대 문과대 교수로 한국어 구조론을 연구했다.


해방을 불과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7월20일 새벽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대문 앞에 일본 헌병 셋이 서서 새벽기도를 하러 나온 아버지를 연행해 간 것이었다. 아버지가 친형제처럼 지내는 이권찬 목사도 같이 끌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패망을 예감한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민족지도자 400명의 명단을 만들어 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는 순간 그들을 몰살할 계획이었다. 그 명단 가운데 문재린과 이권찬이 들어 있었는데 이들은 만주에 있다 보니 미리 체포해 두었다가 때가 되면 처형하려고 한 것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조양천, 연길, 도문, 훈춘, 남양평 역과 자동차 정거장을 두루 다녀 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늘 여장부처럼 꿋꿋하게 집안을 이끌어 온 어머니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16살 때 아버지와 결혼해서야 겨우 소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어머니 김신묵은 명동여학교 동창회 회장과 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을 오랫동안 맡았고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세워 가르쳤다. 또 항일여자비밀결사대의 회원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평양으로, 캐나다로 유학을 다닐 때도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농사짓고, 해마다 구들을 새로 놓고, 돼지와 누에를 키웠다. 용정으로 와서는 중앙교회의 주일학교 선생과 여전도회 회장을 맡았다. 동만여전도회가 창립되자 그 회장직까지 맡았다.

수소문 끝에 우리는 아버지가 함경북도 성진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헌병대 앞마당에 판 방공호를 개조한 감옥 속에 갇혀 있었다. 바닥에는 축축하게 젖은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햇빛을 볼 수도 없었다. 손을 씻지 못한 채 맨손으로 밥을 먹은 아버지는 이질에 걸려 한참을 고생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꿈속에서 하나님이 살려줄 거라는 계시를 받아 풀려날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기도 중에 풀려날 날짜가 8월11일이라는 것을 일본말로 응답받았다고 한다. 두 분은 기적처럼 바로 그날 풀려났다.


한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상봉을 한 우리 가족은 며칠 후 감격에 찬 해방을 맞이했다. 8월14일 밤 중대한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우리는 ‘이제 올 것이 오는구나’ 하며 친구들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날,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 선언을 하는 일본 쇼와(소화) 천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질렀으되 일본 순경들이 마지막 발악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거리로 나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전날 도망을 가버려 파출소는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우리 동족들은 나와서 춤을 추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때 이미 남북한이 갈라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치솟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삼팔선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이 공산 정권을 세우면 미군이 주둔한 남쪽과 갈라지고 말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기다란 광목에 검은 붓글씨로 쓴 현수막을 내걸었다. “동포여! 하나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