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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10] 공산당 압제로 만주를 떠나다

by 올미랭 2019. 3. 10.

공산당 압제로 만주를 떠나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해방이었으나 용정은 곧바로 무정부 상태가 돼 버렸다. 한 중국 교회 청년 80명이 몽둥이를 들고 용정의 치안을 맡기도 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삼팔선이 그어져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비극이 시작됐다. 용정에 있던 기독교 청년들은 그동안 만주 정부에 빼앗겼던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를 되찾기로 결의했다. 나는 장윤철 선생을 교장으로 모시고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명신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장윤철 선생은 은진 6회 졸업생으로 명신 재건을 주동했다. 서울에 와서는 대광중·고등학교 교감과 신일고등학교 교장으로 평생 청빈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다. 얼떨결에 맡은 국어 과목이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기에 열심히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농구와 탁구 코치로 학생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학교 합창대의 반주까지 맡아서 말하자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이렇게 우리가 신나게 활동을 시작하자 용정에 잠복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자치단을 결성해 용정의 치안을 맡았다. 이들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예배를 금지하고 도덕 선생에게는 유물사관을 가르치라고 강요했다. 노래와 무용에 능한 여학생들을 공산주의 선전용으로 뽑아 가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이 거세지자 기독교 선생들은 하나 둘 남한으로 도피해 가고 말았다. 장윤철 선생도 이때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다가 결국은 사임하고 남쪽으로 피신을 한 것이었다.


45년 10월 초 아버지는 서울에서 열리는 기독교 총회에 갔다가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자 이승만을 만났다. 그 며칠 사이에 만주는 공산당 천지가 되었다. 소련군 사령부와 조선인 공산군이 들어오자 기독교인의 아이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춤을 추며 반겼다. 서울에서 용정으로 돌아오려는 아버지를 모두들 만류했으나 ‘간도를 사수하겠다’는 그의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10월12일, 용정시 공산당원들이 밤중에 뛰어들어 가택 수색을 하더니 아버지를 잡아갔다. 죄목은 아버지가 이승만과 내통을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때는 감옥살이를 영광으로 생각했던 어머니였지만 이번에는 ‘분통이 터진다’며 견딜 수 없어 하셨다. 그리고 사십 리나 되는 연길형무소를 이틀에 한번씩 찾아갔다.


학교에서 내 처지도 몹시 난처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포된 상태에서 나는 다른 교사들처럼 피신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남은 기독교 선생이 되었고, 앞날이 불안했던 학생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공산당원들에게 유혹을 받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내게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진심을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 문동환 목사

 

이듬해 1월5일 아버지는 또한번 기적처럼 풀려났다. 은진 출신의 공산당원들이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문재린 목사를 풀어주어야 민심을 회복할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풀려난 지 21일 만에 아버지는 또다시 소련 헌병대에 끌려갔다. 아버지가 소련군 트럭에 강제로 실리자 어머니는 “이번엔 나도 잡아가라, 죽이려면 나도 죽여라!”고 외치면서 트럭에 타려고 했다. 그러자 소련 병사가 어머니를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다시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서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4월28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그 놀람과 반가움이 어떠했겠는가? 소련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 그 순간 어머니는 방에 털썩 주저앉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죄인들과 함께 소련으로 데려가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석방을 한 것이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20년 동안 목회를 해 온 곳이자 50년 전 선친이 큰 뜻을 품고 개간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운 만주땅을 두고 떠날 결심을 한다. 우리는 대문에 “문 목사는 심히 몸이 약하시어 당분간 면회를 사절합니다”라는 글을 써 붙이고 뒷문으로 탈출했다. 나는 어머니, 선희, 영환, 은희와 일주일 뒤에 남하했다. 내가 떠난 뒤 명신여학교는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학생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