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기둥 밑에서 기독론 탐미
공산당 천지가 된 고향 만주를 뒤로하고 서울로 내려오는 가족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서울에 도착한 우리 여섯 식구가 가진 돈은 1500원뿐이었다. 여관에서 하룻밤 묵을 돈밖에 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서울역 앞 동자동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 전신) 사택에 사는 김재준 목사를 찾아갔다. 마침 그 댁에 빈방이 하나 있어 우리 식구들은 거기에서 당분간 머물렀다. 아버지가 영어를 잘하기에 군정청에서 일하라고 소개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단박에 거절을 하고 다음날부터 미군부대 공사장에 인부로 일을 나갔다. 반바지에 모자를 쓰고, 허리춤에 수건을 차고 도시락을 들고 노동판에 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숙연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음날부터 아버지를 따라 공사장에 나가서 하루 일당 80원을 벌었다. 둘이 번 160원으로 가족들의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영어를 잘하는 것을 본 한 남로당 고위 인사는 아버지에게 남로당에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제의를 했다. 아버지가 자신은 목사라며 거절하자 “그래도 노동을 소중히 여기니 참 좋다”고 말했다. 얼마 후 송창근 목사의 소개로 아버지는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의 목사로 초빙이 되어서 가족들과 함께 떠났다.
나와 익환 형은 김재준 목사 집에서 살면서 조선신학교에 편입했다. 우리보다 일년 아래에는 강원룡·박봉랑·김관석·이우정·장준하가 있었다. 장준하에게는 내가 “장형, 신학을 시작했는데 졸업은 해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강권을 해서 한신 동문이 되었다. 여학생으로는 이우정과 앞을 못 보는 양정신이 있었다.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가 된 이우정은 그때만 해도 말이 너무 없었다. 두 여학생은 늘 붙어 다녔는데, 양정신은 말이 많고, 이우정은 말이 없어 ‘소경과 벙어리’가 같이 다닌다고 놀릴 정도였다. 양정신은 이후 기독교장로회 최초의 여성 목사이자, 시각장애인 목사로 인천삼일교회에서 시무했다.
부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김재준 목사의 조직신학과 구약, 송창근 목사의 목회학, 한경직 목사의 교회사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 초기 시절이라 강의가 아직 빈약했기에 나와 형은 번갈아가면서 강의를 들으러 가곤 했다. 형과 나는 필기한 노트를 서로 나누어 보면서 각자 하고 싶은 공부에 빠져들었다. 형은 주로 구약에 관한 책을 읽었고, 나는 기독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나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송 박사의 강의에 나갔더니 “오늘은 동생이 나오는 날인가” 하고 농담 섞인 말로 직격탄을 날려서 난처했다.
당시 조선신학교 학장이던 송 목사는 김재준·한경직 목사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교의 느티나무 아래서 한국 교회를 세계 수준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인물 양성을 함께 하자고 약속한 삼총사였다. 그는 재치 있는 목회로 성남교회(구 바울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나도 여기에서 주일학교와 청년회, 성가대를 돕고 있었기에 그와 가까이 지냈다. 그의 강의는 현장 목회의 경험 이야기가 많아 유익했다. 그는 목회 성공의 비결로 첫째, 부인들을 잘 다스리면 된다고 했다. 둘째는 어느 한두 장로에게 치우치지 말고 등거리로 대하라고 했다.
그는 1947년 학교의 재정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풍을 맞아 사지를 헤매다가 돌아왔으나 몸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피하지도 못하고 교수 사택에 연금되다시피 시달리기도 하고, 인민군 헌병대 본부로 쓰이던 세브란스병원에 끌려가 문초를 받기도 했다. 그는 공산군이 후퇴할 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던 길목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김재준 목사는 “만우 송창근은 유머에 능했고, 인정스러웠고, 창의적이었고, 용감했으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할 만큼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였다”고 하였다. 그의 죽음은 조선신학교와 한국 기독교계에 큰 슬픔과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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