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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13] 해고를 화형으로 통역하다

by 올미랭 2019. 3. 10.

해고(파이어:Fire)를 사형으로 통역하다

 

 사울에서 탈출한 우리는 김천으로 갔다. 마침 그곳에 한국군 정보부대가 주둔해 있어서 영어로 번역해 유엔군에 전달하는 일을 도왔다. 정보부대에서는 인민군 첩자들, 주로 혼자 피란 나온 처녀들을 체포해 조사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은 순진한 시골 처녀들이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그 처녀들을 뒷산으로 끌고 가 성추행을 한 다음 총살시켜 버리는 흉측한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질겁을 한 나는 다음날부터 부대에 나가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인민군이 김천까지 밀고 내려와 우리는 다시 부산으로 피해 갔다. 미군 수송부대에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통역 할 일이 별로 없어 페인트로 ‘입구’, ‘출구’ 등의 안내판을 쓰기도 했다. 하루는 한국인 운전사가 운전을 험하게 하자 미군이 화를 내며 “운전을 잘하지 않으면, 유 윌 비 파이어드!”(You will be fired!)라고 말했다. 나는 좀 심하다 싶었지만 “운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화형’시킬 것이다”라고 통역해 줬다. ‘파이어’에 ‘일을 그만두게 하다’라는 뜻이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운전사는 사색이 되어 나를 쳐다봤다.


9월 하순 맥아더 장군이 인천항에 상륙하자 우리는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선희가 밤낮으로 부모님 생사를 걱정하였기에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행히 가족들은 모두 안전했다. 그러나 겨울 들어 중공군 3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진격해 오면서 우리는 다시 서울을 떠나야 했다. 마침 아버지는 선교부의 주선으로 ‘닛폰마루호’에 각 교파 교역자 가족 580명을 태워 피란시키는 작업의 단장을 맡았다. 50년 12월21일 애초 부산으로 향했던 배는 입항 허가를 받지 못해 제주도에 정착했다. 나는 장하구·하린 형제와 같이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사이 조선신학교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신학대학교도 옮겨와 남부민동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계속했다. 선희는 피란 중인 52년 3월 한신대를 졸업했다.


천막신학교 기숙사에서 머물던 어느 날 함흥에서 온 김형숙 원로 목사가 나에게 거제도에 있는 피란민 천막교회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흥남에서 내려온 100여명의 피란민들이 캐나다 선교부의 도움으로 아양리 근처 해변가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따로 지은 천막 하나가 교회당이었다. 나는 아직도 예수의 신성에 대한 확신은 없었으나 대신역에서 얻은 깨달음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거제도에서 떠돌이 피란민들과 지낸 열 달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어느 날 밤 부산에 갔다가 밤늦게 아양리로 돌아오는데, 천막교회 뒷마당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뛰어가 보니 어떤 남자가 밧줄로 나무에 묶여 있고 커다란 모닥불 앞에서 무당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들어간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회 뒷마당에서 말이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지만 뾰족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다음날 그 미친 남자의 부인은 굿을 해도 낫지 않는다며 내게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했다. 무당과 경쟁을 해야 하는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열에 시달리면서 “공산당이 날 잡으러 온다!”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공산당이 싫어서 당에  들지 않았습꾸마. 그래서 공장에서도 늘 긴장했었습꾸마.” 부인의 하소연에 나는 속으로 “하느님, 제가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천막 기둥에 묶여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게 침을 뱉으면서 어서 풀어놓으라고 고함을 쳤다. 나는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부인에게 얼굴과 손발을 씻어주라고 했다. 밧줄에서 풀려난 그는 의외로 얌전하게 얼굴을 씻고는 바로 자리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가족들과 함께 수요예배에 나타났다.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겪은 기적이었다.


얼마 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익환 형이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대학의 장학금을 얻어주었다. 그곳은 김재준 목사가 학부를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다. 51년 8월 말, 나는 마침내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에 올랐다. 용정에서부터 함께했던 전택완 장로와 정대위 목사, 그리고 피란 나온 성남교회 친구들이 송별회를 열어 태극기 위에 한마디씩 격려의 말을 써 주었다. “한국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변하지 말고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