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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목사 01]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동을 타고나다

by 올미랭 2019. 3. 10.

출처: http://cafe.daum.net/moontonghwan/HibI/1



길을찾아서] ‘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명을 타고나다
떠돌이 목자의 노래1
한겨레
» 나의 아버지 문재린(기린갑이·왼쪽)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고만녜·오른쪽) 권사 부부, 1951년 제주도 피난시절 모습이다.
19세기가 저물어가는 1899년 2월18일 새벽 다섯 살 고만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 30대 후반의 동학도이자 실학자였던 아버지 김하규의 식솔을 비롯해 김해 김씨 가문 63명은 이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살을 여미는 바람을 뺨에 맞으며 고향 회령을 떠나 북간도로 향했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며 고만녜가 자꾸 넘어지자, 우차를 몰던 김하규는 고삐를 큰아들 진묵에게 넘겨주고, 넷째딸을 자신의 짐 위에 앉혔다. 고만녜는 “아바이, 우리 부걸라재 가면 부자가 되능겜둥?” 하며 새로운 세상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래 우리는 부자가 될 거다. 거기는 감자도 내 주먹만큼씩 크지.” 아버지의 목을 껴안고 온기를 느끼던 고만녜에게 그 말은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고만녜는 눈을 떴다. 두만강 건너편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회령의 회바람벽을 한 원님 관사가 눈에 들어왔다. 고만녜의 옆에는 문씨 가문의 한 살 아래 사내아이 기린갑이가 불을 쪼이고 있었다.

이들 북간도 이주단은 종성의 두민(頭民·한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는 어른)을 지낸 학자이자 기린갑이의 증조부인 문병규, 동북쪽 국경을 지킨 무인의 후손인 김약연,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그리고 고만녜의 아버지인 회령의 김하규 등 네 가문으로 모두 141명이나 됐다.

이들이 이날 향한 곳은 두만강변에서 50여리 떨어진, 나중에 ‘명동촌’이라 불리는 부걸라재(중국말로 비둘기 바위)였다. 그로부터 22년 뒤 그 고만녜 김신묵(1895~1990년)과 기린갑이 문재린(1896~1985년)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내가 태어났다.

명동촌의 아이들은 학교나 교회나 집에서 귀에 뿌리가 나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쳐지지 않는 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이순신·을지문덕 장군 등 옛 위인뿐만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애국가, 독립군 행진가를 가르쳤다. 베갯머리에도 태극기를 수놓았다. 동네에 나가서도 ‘독립군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의 배에 딱 달라붙으면 아무도 볼 수 없고, 땅에 개미처럼 기어 십리를 간다’는 등 독립군의 영웅담을 늘 들었다.

조국의 쇠망에 의분했던 네 명의 실학파 선비들이 북간도로 이주한 목적 중에는 이처럼 아이들을 잘 가르쳐 나라를 지킬 인재를 길러보자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만주인의 땅을 사서 돈을 낸 비례대로 나누고, 그 중 가장 좋은 땅을 갈라내어 학교 운영비를 조달할 학전으로 삼았다. 나의 할아버지 문치정은 신임이 두터워 마을의 재정을 맡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뒤 일본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의정부 참판 이상설은 후에 임시정부 주석이 된 이동녕 등과 함께 용정에 들어와서 서전서숙을 시작해, 간도에는 신학문 바람이 불었다. 2년 뒤 4월 이상설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 밀사로 간다. 그 여파로 서전서숙이 문을 닫은데다, 서울 조정에서 신학문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김약연·김하규·남위언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세 서당을 합쳐 명동(明東)서숙을 만들었다. ‘동이족의 후예들을 밝히기 위해 일꾼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그 때부터 마을 이름도 부걸라재 대신 명동촌으로 불렸다.

» 문동환 목사
교사로는 이동휘·안창호·김구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서 간도 조선족의 교육운동을 위해 파송한 정재면이 초청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하게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유학자들은 주저했으나, 신학문 선생을 놓치기 싫어 이를 승낙하고, 1908년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무주임으로 하는 명동학교를 열었다. 일년 뒤 정재면은 신학문의 완성을 위해서는 부모들까지도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명동 주민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으나, 결국 모두 상투를 자르고 22살의 젊은 선생 앞에서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드렸단다. 이는 신문명을 갈망하는 선각자들의 처절한 몸짓이기도 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동만주와 한반도 동북지방 일대에 포교한 캐나다 북장로회는 평안도와 한반도 남쪽 일대에서 포교한 보수적인 미국 남침례교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 신학이어서, 기독교는 곧 명동촌의 항일 민족주의 의식을 키우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명동학교는 곧 민족운동의 요람이 됐다.

그런 명동촌에서 태어나면서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규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2008년 7월 21일 부터 약 두달간 한겨레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 문동환 목사의 회고록입니다. 정리- 문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