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비자 발급 하루전 터진 6·25
1946년 서울로 내려와 5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까지 내 삶은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한 떠돌이였다. 김재준 목사의 이단 파문으로 시끄러웠던 조선신학교를 1년 만에 졸업하고 목사 자격을 얻었지만 앞날은 묘연하기 그지없었다. 예수의 신성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목회의 길로 들어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준 것은 신학이 아니라 실존이었다. 아버지와 가족들이 있는 김천 황금동교회로 내려온 47년 여름, 나와 형 익환은 가까운 금오산에 가서 기도하면서 미래를 고민해 보기로 했다. 둘은 금오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기차가 중간에 고장이 나서 ‘대신’이란 간이역에 잠시 머물렀다. 그 역은 언덕 위에 있어서 아랫마을 농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 낙동강이 흘러가고 양쪽 언덕에는 허름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게딱지 같은 집들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에는 너무나 비참했다. “그렇군! 누군가가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해. 예수님이 갈릴리의 비참한 농민들에게 내려간 것처럼 나도 그를 따라 살아야 하는 거야.” 신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하겠다는, 그래야만 내 삶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그즈음 용정의 명신여중 교장으로 나와 가까웠던 장윤철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개성 부근 장단의 중학교 학감으로 취임하는데 나더러 음악선생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학교는 경기도 파주를 지나 장단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 들어간 아름다운 마을에 있었다. 마침 교실 앞에는 코스모스가 꽃밭을 이뤄 나는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코스모스 밭에 누워 공상도 하며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
일년 뒤 장윤철 선생이 새로 설립된 서울 대광중·고등학교 교감으로 옮기면서 함께 가자고 권해서 나는 국어를 맡기로 했다. 대광중고에서 나는 합창단도 만들고 농구 코치도 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48년 8월 아버지가 돈암동 부근 신암교회를 맡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김천에서 다시 상경했다. 49년 여름 형은 미국 장로교회의 장학금을 받아 프린스턴 신학교로 홀로(형수와 의논도 없이) 유학을 떠났다. 형처럼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수소문 끝에 이듬해 밥존스대학 신학과에서 장학금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 비자 발급일은 50년 6월26일. 그런데 그 하루 전에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일요일인 그날 오후 친구들과 교회에서 탁구를 치면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와 우리 가족은 무사태평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이 나도 첫날에 평양에 태극기를 꽂고 다음날이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벽녘 장하구 형이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포위당했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목사님?”
아버지는 조급하게 결정을 하지 말고 기도를 하면서 기다려보자고 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기도가 끝나자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리 서울이 포위됐다고 해도 도망갈 길이 있을 테니 선희를 데리고 서울을 탈출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24살 처녀인 선희가 제일 위험할 거라고 보신 것이었다.
나와 선희는 간단한 보따리를 꾸려 조선신학교로 갔다. 사무실에서는 송창근 박사를 비롯한 교수들이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면 어디로 가겠어? 남아서 신학교를 지켜야지” 이런 식이었다. 허겁지겁 도망을 치려던 것이 부끄러워 다시 집으로 가려는데 학교 앞 구름다리에서 전택완 장로를 만났다. 그는 잔말 말고 서울을 빠져나가라고 강권했다. 이때 뵈었던 모습이 송 박사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서울역은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선희의 손을 잡고 겨우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는 서서히 움직였지만 한강철교를 무사히 건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모님도 모시고 올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동시에 내 마음은 한없이 서글퍼졌다. 일제하 독립을 외치며 그렇게도 고생하던 우리 민족이었는데 이제는 같은 민족의 침범으로 도망을 가야 하다니! 우리가 수원에 도착했을 때 한강철교가 폭파되었다. 그리고 대전 가까이 왔을 때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서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부 >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동환 목사 17] 인종 넘은 사랑의 그 거룩한 권리 (0) | 2019.03.10 |
---|---|
[문동환 목사 16] 폐병 유학생 지옥을 다녀오다 (0) | 2019.03.10 |
[문동환 목사 14] 진보 개신교의 밀알 복음동지회 (0) | 2019.03.10 |
[문동환 목사 13] 해고를 화형으로 통역하다 (0) | 2019.03.10 |
[문동환 목사 12] 종교재판을 받은 진보신학 (0) | 2019.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