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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17] 인종 넘은 사랑의 그 거룩한 권리

by 올미랭 2019. 3. 10.

인종 넘은 사랑의 그 거룩한 권리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나는 폐병 요양원에서 5개월을 더 머물렀다. 몸이 많이 약해져, 주로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수채화를 그리거나 도자기를 빚었다. 폐병 요양원에서는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미술 수업을 마련해 놓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채화를 그려보았다. 돌이켜보니 조국이 불운하던 시기에 태어나 지금까지 한순간도 편안하게 쉬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청교도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절제하도록 배웠다. 그동안 나는 공부와 일에 매달려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나는 투명한 수채화로 풍경과 화병에 꽂힌 장미를 그렸다. 흙으로 도자기를 빚으면서 모든 시름을 잊었다.

요양원에서 느꼈던 삶의 여유로움도 잠시,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만 38살.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내가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것을 걱정해 유학중인 한국 여성을 만나보라고 닦달했다. 그러나 오래전 첫사랑에 실패했던 나는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피터 마샬>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불치병을 앓는 젊은 목회자와 그의 부인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펑펑 울었던 만큼이나 나는 사랑을 원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깨달음이 있은 뒤 나는 여성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 놓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이상하게도 주변에서 여러 여성들이 나에게 접근을 해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었기에 외국 여성들과 사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식당에서 사회사업을 공부하는 한 젊은 여성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페이 핀치백이었다. 퍽 귀엽고 명랑했다.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다. 나는 매일 아침식사가 끝나면 의사의 명령대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해야 했다. 어느 날 페이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 뒤 우리는 매일 조반 후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핀 엘리자베스 공원으로 산책을 다녔다. 그는 한국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아리랑>이나 <천안삼거리> 같은 우리 민요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는 장미농장의 딸로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기독교 가치관은 놀라울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에는 뉴욕 할렘가 흑인 빈민가에서 봉사를 하기도 했다. 그때 한참 불타고 있던 흑인민권운동 집회에도 참석하는 등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대책 없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일단 페이는 나보다 15살이나 아래였다. 우리 부모님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조차도 한국 교회에서 미국인 사모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펄펄 뛰었다. 사실 교수들도 우리의 교제를 탐탁잖아했다. 장학금을 주고, 피도 헌혈해 줄 정도로 나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나, 이 문제에서는 냉정했다. 젊은 미국 여자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으면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인종적 문제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나중에 알게 됐다. 모두들 나서서 우리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난리였다. 나는 페이와 헤어질 작정으로 캠퍼스를 떠나 나를 도와줬던 고든 스코빌 목사의 집으로 갔다.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이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동상처럼 변해 러시아 함대의 함포 사격에도 꿈적도 안 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붙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이 꿈의 의미를 금방 해몽할 수 있었다. “38살의 나이에도 아직 아버지와 완고한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내 삶은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것은 나의 거룩한 권리요, 의무이기도 해.” 페이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나는 스코빌 집을 떠나 기숙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