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일제의 학병 징발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입학했던 봉천 신학교를 한 학기 만에 그만둔 형과 나는 만보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신경(장춘)에서도 걸어서 몇 십 리를 더 가야 하는 오지였다. 전라도에서 일제의 탄압과 가난에 쫓겨 온 빈농들이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해 2월부터 형은 만보산교회의 전도사로, 나는 소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장준하 형이 결혼을 결심하도록 옆에서 조언을 했던 나는, 44년 6월 익환 형과 박용길 형수의 결혼이 성사되는 데도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랬던 나는 정작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못했지만 말이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났던 박용길의 집에서는 형이 ‘폐병 환자’라는 이유로 결혼을 결사 반대했다. 친정어머니는 ‘문익환과 결혼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형을 보다 못해 나는 미래의 형수에게 편지를 썼다. ‘청개구리는 엄마개구리의 유언에 따라 물가에 묻었다가 후회를 했다. 결국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은 자식의 행복이 아니겠느냐?’ 내 편지를 받은 형수는 ‘6개월만 살다 죽어도 좋다’며 결혼을 결심했다.
우리는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던 낡은 교회 사택에서 지냈다. 형님네는 부엌에 닿아 있는 아랫방에 살고 나는 그 윗방에 살았다. 내 방으로 들어가려면 신혼부부의 방을 지나쳐 와야 해서 늘 미안했다. 벽지 안으로 서리가 내 손가락 한마디 정도 얼어 있을 정도로 만보산의 겨울은 용정의 겨울보다 훨씬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서울에서 곱게 자란 코스모스(형은 1939년 요코하마 한인교회에서 형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연분홍 코스모스라 불렀다) 같은 형수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만보산 소학교에서 2학년 반을 맡아 처음 출근한 날 받았던 충격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교단에 서서 30여명의 아이들을 둘러보았는데 아이들의 얼굴은 언 감자처럼 거뭇거뭇했다. 아이들은 불안한 눈으로 큰 키의 새로 온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아이들은 때리는 줄 알고 몸을 움츠렸다. 바닥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고, 깨진 창문에 붙인 신문지가 바람에 너덜거렸다. 아이들은 대부분 맨발에 초신을 신고 있었다. 나는 신경에 나가 화병에 꽃이 그려진 정물화를 사다 벽에 걸고, ‘웃음은 얼굴의 꽃, 사랑은 마음의 꽃, 웃읍시다, 사랑합시다’라는 표어를 써 붙였다. 나는 가능한 한 아이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그런데 부임을 한 첫 주에 아이들의 월사금이 없어지는 도난 사건이 세 번이나 발생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연극을 벌였다. “선생님은 맥박을 짚어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능력이 있어.” 아이들 모두 책상 위에 손을 올리게 하고는 손목을 꾹꾹 누르며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 짚어 본 다음 교단으로 다시 올라가 “누가 돈을 훔쳐갔는지 알지만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어. 밤늦게까지 교무실에서 기다릴 테니 찾아와!” 제대로 씻기지 않아 피부가 생선 비늘처럼 벗겨졌던 외톨이 소년 김상봉이 밤늦게 교무실로 찾아왔다. “너 왜 돈을 훔쳤지?”, “어머니가 좋아해요.” 계모였던 엄마가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켰던 것이다. 나는 그 집에 두어 번 찾아가기도 했다.
45년 초 형수의 출산(7개월 만에 죽은 맏딸 영실)이 임박하자 형은 신경에 있는 중앙교회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다시 용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같이 교회를 섬기면서 새로운 세상이 전개되기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날로 강해지는 미군에 밀려서 허덕이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광복을 6개월 남짓 앞둔 그해 2월 윤동주가, 3월에는 송몽규가 죽었다는 부고가 일본에서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잇달아 그들의 장례를 집례했고, 절친한 친구였던 형은 물론 우리 가족 모두 충격에 빠졌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1385.html#csidxc5be05beb19962c8a36575bc889c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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