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미 내 마음에는 어린 눈에도 한없이 위대해 보였던 김약연 명동교회 목사의 모습이 있었다. 둥근 달덩이같이 윤기가 나는 얼굴에 흰 콧수염을 팔자로 기르고 늘 하얀 두루마기를 입던, 엄하면서도 인정 어린 모습을 한 김 목사는 만주 일대 민족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동만의 조선족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설교에서 모세, 여호수아, 베드로 같은 인물 이야기를 많이 해 줬다. 남녀석이 구분된 조그만 교회당에 나는 형 익환과 나란히 앉아 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이처럼 존경할 만한 여러 어른들을 늘 보면서 자란 나에게 명동학교가 아닌 용정의 영신소학교가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원래 영신학교는 용정에 있는 신교 교회들이 세웠으나 흉년이 들어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일고라는 일본인 유지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6학년 때는 교장인 다카네가 담임선생이 되어 조회시간마다 묵념을 시키고는 일본 시를 낭독하곤 했다. 유일한 낙은 친구들과 농구를 하는 것이어서 5학년 때는 농구 클럽까지 만들어 살갗이 벗겨지도록 뛰어놀았다.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다행히 은진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광명중학교 입학시험도 치렀으나 낙방을 먹었다. 학과 시험에는 급제를 했는데 그만 성격이 퍽 내성적이어서 제대로 면접을 못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은진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 차라리 훨씬 잘된 것이었다. 은진학교는 캐나다 선교부가 세운 학교로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교실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삼일절과 단군기념일까지 지켰던 기억이 난다. 역사를 가르친 명희조 선생은 동경에서 공부를 할 적에도 일본에 돈을 주기가 싫어 전철을 타지 않았고 방학이면 고향인 평양에 다녀올 때도 기차 대신 자전거를 탔다는 말도 들었다. 은진학교에서도 난 여전히 운동에 미쳐 있었다. 농구선수 후보로 뽑혀 공부는 하지 않고 운동만 했더니 성적이 45명 중에 22등으로 떨어졌다. 걱정이 된 아버지는 마침내 우리 교회(용정 중앙교회) 장로였던 구정서라는 의사를 통해 내게 운동 금지령을 내렸다. 내 폐가 약해서 지나친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반항을 하지 않고 농구를 그만두었다.
나는 음악부에서도 활동했다. 익환 형은 목소리도 좋고 성악에 관심이 많아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면서 발성 연습을 하곤 했다. 좋은 가곡은 오선지에 베껴 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곤 했다. 교회 피아노를 치며 독학으로 익힌 솜씨여서 서투르기는 했지만 저녁 예배시간에 찬송가 반주를 할 정도는 됐다. 형은 테너여서 노래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나는 바리톤이어서 독창을 하기에는 약했지만 형과 함께 이중창을 불러서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우리는 “가을 하늘은 맑았고 시원한 바람 부는데 …”(가을 하늘) 등의 가곡을 즐겨 불렀다.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밴드부에서 나를 끌어들였다. 뻬스(베이스의 북한 사투리, 튜바와 비슷한 악기) 불 사람이 없다 해서 해 보았더니 제법 소리가 났다. 악보를 볼 줄 알았기에 붕붕붕 박자를 맞춰 주는 정도는 쉽게 따라했다. 그러니 수업이 끝나도 학교에 남아 있을 구실만 더 많아졌다. 그런데 연습할 때는 날아다니던 나는 마음이 약해서 정작 경기에 나가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면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
'공부 >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동환 목사 06] 일본 공대 유학 압박에 일단은 (0) | 2019.03.10 |
---|---|
[문동환 목사 05] '평생 스승' 김재준 목사를 만나다 (0) | 2019.03.10 |
[문동환 목사 03] 80년전 캐나다로 유학간 아버지 (0) | 2019.03.10 |
[문동환목사 02] 잘생기고 착한 형 익환 (0) | 2019.03.10 |
[문동환목사 01]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동을 타고나다 (0) | 2019.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