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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06] 일본 공대 유학 압박에 일단은

by 올미랭 201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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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용정 은진중학교 17회 졸업생들과 찍은 기념사진. 맨 뒷줄 오른쪽이 필자(문동환), 가운데 양복 차림이 담임 채우병 선생, 셋째 줄 맨 왼쪽이 강원룡 목사다.

나에게는 세 살 아래 동생 두환이가 있었다. 두환이는 네모반듯하게 생긴데다 할머니(박정애)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기세가 등등했다. 주일학교에서도 어찌나 까부는지 형과 나는 두환이를 따돌리곤 했다. 한번은 내가 집 앞의 무성해진 풀을 베어 장에 내다 팔려는데 두환이가 리어카를 앞에서 끌며 같이 갔다. 가는 길에 한 중국인이 풀을 사겠다며 자기네 마굿간으로 갖다 달라고 해서 둘은 신이 나서 갔다. 그리고는 8전을 받았다. 내가 3전만 줬더니 두환이는 똑같이 나눠야 한다고 떼를 썼다.

얼마 뒤 동생은 뇌막염으로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나는 풀을 판 돈을 공정하게 나누지 않은 게 괴로워 두환이가 좋아하는 월병을 사다 주었다. 열이 높아서 월병을 잘 먹지도 못하면서도 두환이는 “형, 고마워” 하며 좋아했다. 두환이가 죽고 나니 살아 있을 때 잘해주지 못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는 두환이를 가졌을 때 집으로 들어오려는 호랑이를 내쫓는 꿈을 꾸었는데 그래서 죽었나 보다 하며 울었다. 이듬해 바로 영환이가 태어나자 할머니는 죽은 두환이가 살아왔다며 그렇게 좋아했다.

은진중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당연히 신학교에 진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익환 형이 이미 동경의 일본 신학교에 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월급으로는 둘 다 대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목사가 될 수 없다면 학교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적당한 선생 자리가 쉽게 나타나질 않아서 한동안 제창병원의 약제사 조수로 취직을 해 두어 달 약봉지를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진중에서 일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영림소(營林所)는 백두산 근처에서 잘라낸 나무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월급이 병원보다 4배나 많으니 그 돈을 모아 유학 경비를 준비하면 되지 않겠냐고 강요하셨다. 그러나 10대 후반의 청년이었던 나는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떻게 일본 사람 밑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나는 좀더 기다렸다가 소학교 선생 자리를 구해 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지고 말았다. 영림소에서 보낸 일년은 나에게 지옥살이 같았다. 군대식으로 상하의 규율이 강하고 대리석처럼 차가운 일본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힘들어 출근하는 게 형무소로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밑동이 잘려 두만강을 둥둥 떠내려가는 나무처럼 시들어 갔다.

» 문동환 목사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었는지, 나는 심한 두통을 앓기 시작했다. 머리를 움직이면 머릿속에서 뇌가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소의 뇌수를 사다가 기름에 볶아 주시곤 했다.

일년 뒤 다시 모교에서 연락이 왔다. 만주국의 교육정책이 변해서 은진중을 공과중학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졸업생 중에 수리에 능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줘 공과대학을 졸업하게 한 뒤 은진중 교육을 책임지게 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내가 선택되어 일본에 가서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응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냐며 “본래 네가 바라던 것이 신학 아니면 교육인데, 교육사업을 하다가 나이가 좀 든 다음에 신학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라며 설득을 했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나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부모가 소를 몰고 지붕으로 올라가라고 해도 자식은 그러는 척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아버지는 캐나다에서 유학까지 하셨지만 그래도 유교적인 사고방식은 어쩔 수가 없군. 절대자 하느님에게는 절대적인 순종을 해야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자가 아니지 않으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고집을 부렸다. 안 그래도 두통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아버지와 대결을 하려고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건부로 이를 수락했다. 동경에 가서 일년 뒤 공과대학 입학시험을 보아 붙으면 진학을 가지만 첫해에 떨어지면 더는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공과대학 공부를 하지 않고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