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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신학

[문동환 목사 03] 80년전 캐나다로 유학간 아버지

by 올미랭 2019. 3. 10.

»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11월부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뉴칼리지에서 6개월간 연구하던 시절 아버지 문재린이 그 지역 전통의상인 킬트에 백파이프를 들고 찍은 기념사진. 36살 때 모습이다.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그날 어머니 김신묵은 30리나 되는 용정까지 걸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새벽밥을 해 먹고 길을 나서 종일 굶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셨다고 했다. 아버지 문재린도 북간도에서 제일 큰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지회 서기직을 맡았고, <독립신문> 기자 일을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열기는 높아갔지만 일제의 탄압도 더욱 거세어졌다. 이듬해(경신년) 토벌에는 일제가 노루바위라는 곳의 교회당에 교인들을 집어넣고 통째로 불을 지른 뒤 뛰어나오는 사람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명동교회도 가만히 있다가는 크게 화를 당할 것 같아 문재린을 포함한 대표자 5명을 일본 경찰에 자수시키기로 했다. 아버지는 20년 겨울 일본 영사관에 갇혀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이것이 아버지의 첫번째 옥고였다. 해방 이후 남쪽으로 나올 때까지 아버지는 세차례나 더 옥살이를 한다) 그때 나를 뱃속에 갖고 있었던 어머니는 과부가 되는 줄 알고 무척 놀랐고, 내가 심하게 태동을 해서 걱정을 하셨단다. 그래서인지 나는 태어나서도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독립신문>은 용정민회의 기관보인 <간도일보>의 주필이었던 유하천이 만들었다. 아버지는 기자로 일하면서 신문을 등사판으로 수백 장씩 찍어냈고 학생이나 부녀자들을 시켜서 곳곳에 퍼뜨렸다. 그렇게 뜻있는 청년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느라 빠져나가 교회가 텅 비고 학교에도 선생이 없게 되자 아버지는 스스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졸업한 이듬해 27년부터 모교회인 명동교회와 용정 토성포교회에서 시무했다.

28년 아버지는 캐나다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토론토의 임마누엘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898년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캐나다 선교부는 다른 완고한 선교부들에 비해 재정은 취약했지만 신앙이 새롭고 관대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 선교산업을 선교사들이 독단적으로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27년부터 이사회를 신설하고 선교부 대표와 한국인 대표가 동수로 참석하도록 했다. 또 앞으로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이 꾸려나가야 할 것이므로 젊은 학생들을 유학 보내서 세계 교회와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 첫 유학생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주문한 다른 선교부와 달리 캐나다 선교부는 항일 독립운동을 후원해 주기까지 했다.

» 문동환 목사
아버지는 내가 11살 되던 32년에 귀국해 용정 중앙교회에서 시무를 하면서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그리고 제창병원의 이사로 활동하느라 굉장히 분주하였다. 그 덕분에 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귀국 이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밥을 입에 넣은 채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정했다. 밥을 입에 넣고 말을 하면 그대로 굶어야 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놓으셨다. 하루는 내가 대문을 열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소리를 질렀더니 아버지가 밥을 입에 문 채로 “무어라고 했어?” 그러는 거다. 그 바람에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밥을 입에 넣고 말씀하셨다!”고 신나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럼 할 수 없지. 밥을 굶어야지.” 그러시면서 윗방으로 올라가셨다. 이렇듯 아버지는 순수하게 원칙을 지키는 분이었다.

한번은 밥을 먹다 익환 형과 내가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우리 둘에게 창고에 들어가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벌을 서라고 했다. 우리 둘은 씩씩거리면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 크리스마스 때 불을 밝히는 초롱이 있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우리는 그 초롱을 들고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벌을 서면서도 화목하게 찬송을 부르니 용서한다. 와서 밥을 먹어라!” 했다.

용정에서 아버지께 자전거를 가르쳐드린 일도 기억난다. 집 뒤 운동장에 나가서 “바른편으로, 왼편으로” 하면서 아버지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뛰었다. 아버지는 체격은 꽤 컸지만 운동신경은 둔한 편이어서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끝내 용정에서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다니는 목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