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남몰래 혼자서 한글을 깨우쳤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혼한 뒤 시아버지가 보내주어 여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곳에서 아명인 ‘고만녜’를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어머니의 담임은 신간회에서 간도 교육의 사명을 받고 온 정재면 선생이었다. 그때 명동학교의 선생 월급은 턱없이 적었지만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씨가 생활비를 대주어 대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정 선생은 해방 뒤 서울로 내려와 송추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세상을 뜨셨다. 국어 담당으로 우리 부모님의 주례를 섰던 박태환 선생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저서에 서문을 쓸 정도로 실력자였다. 박태환과 정재면은 함께 서울 상동감리교회 안에 있던 기독청년학원에서 공부를 한 동창이었다. 그곳 출신들이 정 선생을 따라 명동으로 들어왔다. 역사학자 황의돈(문교부 편수관, 단국대·동국대 교수),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역인 한글학자 장지영(연세대 교수) 등도 차례로 교사로 부임했다. 장지영은 국어학자였지만 박태환이 국어를 가르치니까 대신 영어를 맡았다. 여학교에서는 정재면의 누이인 정신태가 성경을 가르쳤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시조인 이동휘의 둘째 딸 이의순이 음악·재봉·이과를 가르쳤으며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늘 강조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동거우는 명동학교가 있는 학교촌으로부터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던 까닭에 우리 형제들은 1학년부터 입학하는 게 무리였다. 우리가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은 뒷방이었다.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면서 우리에게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과정을 직접 가르쳤다. 어머니는 늘 주일학교와 야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종이가 없어서 목판에 모래를 넣고 나뭇가지로 글을 쓰곤 했다. 한글을 배운 다음에는 구구단을 외웠다. 예수님이 어린 양을 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달력 뒷면에 어머니는 구구단을 적어놓았다. 늘 진지하고 엄격한 어머니는 애국가와 독립군의 노래도 가르쳐주었다. 을지문덕, 이순신,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우리들은 집 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를 오르거나, 어머니가 누에를 키우기 위해 심어놓은 뽕나무의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나리꽃의 뿌리를 캐먹기도 하고, 콩을 서리해서 불을 피워 콩을 익혀 먹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개울가에서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는데 그 쫄깃쫄깃한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개구리를 얼마나 많이 잡아먹었는지 한여름인데도 동네에서 개구리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세 살 위인 형 익환은 명동 소학교 3학년으로 입학했다. 후에 같이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동지가 된 형을 나는 어려서부터 많이 따랐다. 그러나 장남인데다가 생긴 것도 시원시원한 형의 그늘에서 나는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루는 외삼촌이 우리에게 참나무로 팽이를 만들어 주었다. 형이랑 주거니받거니하면서 팽이를 돌리는 게 너무 신이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이 다 있을까? 그렇게 놀고 있는데 형이 말했다. “동환아, 팽이 돌리기가 너무 재밌어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겠어. 팽이를 아궁이에 넣어버려야지 안 되겠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건 모두 우상이랬어.” 그러고는 형은 아직 손때가 타지도 않은 새 팽이를 불 속에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빨갛게 타들어 가는 팽이를 보면서 아깝고 속상해서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형은 명동학교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친하게 지내면서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 또 학교가 끝난 뒤에는 외할아버지 김하규에게 찾아가 한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 유명한 명동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게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여덟 살 되던 해 삼촌 문학린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오자 어머니가 나를 삼촌한테 보내 영신소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국어나 산수는 3학년에 입학할 수준이었지만 일본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2학년으로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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