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의 죽음
내가 장준하 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75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가 포천의 약사봉에 등산을 하러 갔다가 의문의 죽음 당하기 약 한달 전이었다. 나는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를 만나러 사무실에 갔다가 그와 마주쳤다. 김관석 목사는 독일의 “Bread for the World"(전 세계에 빵을)이라는 기관에서 활동기금을 보내주곤 했는데 이를 박형규 목사가 하는 활동과 기독청년 운동에도 지원을 해주었다. 그는 이 때문에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대뜸 “문형, 잘 만났군. 백만 명 서명운동에 서명해주게.” 라며 반가워했다. 나는 “또 감옥 갈 일을 꾸미는 군.”하면서 나는 내 이름 석자를 적어 넣었다. “이번에는 좀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해.” 그는 백만 명 서명 운동을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는 요즘 등산을 다니면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게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8월 18일 일요일, 우리는 갈릴리 교회에서 그가 등산을 갔다가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주 등산을 해서 제법 산을 잘 타게 된 장형이 추락사를 했다니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와 형, 그리고 복음동지회의 가까운 친구인 유관우형은 바로 다음날 포천의 약사봉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험한 암석으로 된 30미터 정도 되는 약사봉과 그가 발견되었다는 장소를 확인해 보았다. 이렇게 험한 봉우리에서 추락사를 했다면 많은 상처가 나 있을 텐데 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고, 그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그대로 똑딱거렸다.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추락사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분개한 나와 형과 유관우는 다시 장형의 집으로 직행했다. 거기서 그의 시신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양 팔꿈치에 푸른 멍이 들어있는 것 말고는 상처가 없었다. 그런데 왼쪽 귀 뒤에 날카로운 것에 찍힌 구멍이 나 있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직감했다. 팔꿈치의 상처는 두 명의 정보원이 끌고 가면서 생긴 것이고 목 뒤의 상처는 급소를 찌른 흔적임이 분명했다. 유관우 형은 그가 가지고 있던 활동사진기로 시신을 자세히 찍어 부인에게 주었다. 어처구니없게 남편을 잃은 장후복 여사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담담하게 이 참극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남편이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는지 주변을 정리하였다고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미사를 드리기 위해 얼마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어요. 자기는 구교건 신교건 다를 것이 없다면서... 임시정부에서 사용했던 태극기도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했어요.”
나는 장준하 형을 1943년에 일본 신학교에서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다. 불과 4,5개월을 함께 보냈지만 우리 둘의 사이는 유달리 가까웠다. 나와 형은 일본군 징병을 피해 만주로 가고 그는 일본군에서 탈출해 상해 임시 정부에서 일을 했다. 나는 그의 소식을 알 수가 없어 무척 궁금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947년 경 서울의 한복판 명동에서였다. 만주에서 서울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그를 수소문했다. 그는 명동성당으로 가는 길목의 건물의 2층 단칸방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말로만 듣던 그의 부인을 그날 처음 만났다. 얼굴이 동그스름한 게 복스럽게 생긴 여인이었다. “이 친구가 날 더러 빨리 결혼해 버리라고 충동한 친구야.”라며 나를 아내에게 소개했다.
그 후 나는 그에게 한신에 들어와 시작했던 신학을 끝마치라고 설득을 하였고, 복음 동지회에도 끌어들여 같이 활동을 했다. 그의 아들 결혼식에는 늦어서 함석헌 선생님이 대신 주례를 하였다. 미안하던 차에 그는 딸의 주례까지 맡아달라고 했다. 딸의 결혼식 날에 나는 아침부터 긴장을 하고 준비하는 바람에 30분이나 일찍 가서 주례를 해 주었다.
한신을 졸업한 이후 그는 정치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김구 선생님을 모시고 광복군에 있을 때에도 “등불”과 “제단”이라는 잡지를 편집하였다. 서울에 와서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만들어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다. 박정희는 결국 1970년에 김지하의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서 싸웠던 장형은 관동군의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그의 분노가 그를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 그가 처음 감옥에 간 것은 1970년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되었을 때다. 그는 얼마 후 간경화와 협심증 때문에 언제 심장마비가 올지 몰라 석방되었다. 나는 광화문에 있던 백병원으로 찾아갔다. 본래 얼굴색이 흰 장형의 얼굴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그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는 건강을 위해 등산을 시작했고, 주머니에는 비닐봉지에 심장약을 가지고 다녔다. 혹시 자기가 쓰러지면 그것을 입에 넣어달라고 적어서 매달고 다닐 정도였다. 그의 악화되는 건강도, 반복되는 옥살이도 그의 투쟁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문익환 목사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식은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을 했고,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정치인과 민주 동지들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장엄하게 치러졌다. 철저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산 거룩한 삶이었다. 그 날은 우리 민족을 밝히던 등불이 꺼지던 날이었다. 나에게는 각별한 친구들 떠나보내는 날이기도 했다. 나의 형은 장례식이 끝난 뒤 장준하의 영정 사진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 그의 책상 위에 간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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