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신학

[문동환목사 23] ‘삭발 학장’이 찢어버린 대학교기

by 올미랭 2019. 3. 15.

‘삭발 학장’이 찢어버린 대학교기



1972년 10월17일 대통령 박정희는 기어코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유신독재의 시작이었다. 대학 휴교령과 학생 제적, 강제 징집, 서클 해체 등으로 학생운동은 꽁꽁 얼어붙었다. 1년 가까운 침묵 끝에 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유신철폐 데모가 터졌다. 한신대에서도 이창식 학생회장과 대의원 의장 김성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신앙 양심상 안이하게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학생들이 11월9일부터 열흘 동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채플실에서 예배와 토론으로 신앙적인 결단과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한 이론적인 무장을 계속했다. 우리 교수들도 강의를 할 수가 없으니 날마다 교수 회의실에 모여서 아침 기도회를 열고는 덕담이나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며칠 뒤 11월15일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학장실로 갔더니 김정준 학장이 커튼을 내린 채 머리를 삭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늘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있었기에 이발기계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하얀 길이 생겨났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모두 화계사로 출가라도 하려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알고 보니 안병무 교수의 제안으로 교수단 전원이 삭발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안 교수의 삭발이 끝나자 나도 주저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장발이었던 내 머리가 싹둑 잘려 나갔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안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동환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거울 속에서 은진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이었다. 나도 “병무야!” 맞장구를 쳤다. 그 엄중한 순간에 교수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10여명의 교수들이 머리를 자르고 나오자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날은 마침 학교 근처 이발관이 쉬는 날이어서 성격이 급한 학생들은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예비 목회자들의 배움터인 수유리 캠퍼스에 때아닌 스님이 수십명씩 모여든 형국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며칠 뒤 함석헌 선생이 격려차 방문했다. 선생은 머리를 삭발하는 대신 길게 길렀던 하얀 수염을 잘라 우리와 뜻을 같이했다. 장난기가 있었던 김정준 학장은 자른 머리카락으로 붓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고 했다. 김경재 교수는 학장실에서 자르지 못하고 나중에 이발관에서 머리를 잘랐는데 이발사가 “고시공부 하러 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교수들에게 그날의 삭발은 참회와 아픔과 자책과 고뇌의 한 표현이었다.


다음날부터 학생들은 나흘간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 마지막 날, 성만찬을 기념하는 예배에서 교수들은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처럼 학생들 발을 일일이 씻고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교수들은 학생들과 서로 껴안고 울었다. ‘우리는 한신 가족 좋다 좋아, 함께 죽고 함께 살자, 좋다 좋아,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는 모두 한신 가족’이라고 개사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우리들은 끈끈한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얼마 뒤 김정준 학장은 채플실에서 강단 위에 세워져 있는 한신 교기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면도칼로 교기를 찢었다. 용기 있는 학생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제적을 시켜야 하는 교수의 무능함과 치욕스러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찢긴 교기를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올 때 한 땀 한 땀 다시 꿰맬 것이라고 말했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듯이 나와 김정준 학장은 처음 서먹한 인연으로 만나게 됐다. 애초 61~62년 6대 학장이었던 그는 연세대로 옮겼다가 70년 다시 돌아와 5년 동안 8대 학장을 지냈다. 그사이 7대 학장인 이여진 교수와 한신초교 운영 문제로 갈등을 겪은 나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다. 다른 교수들도 전원 항의 사퇴를 하며 파문이 확산되자 결국 이 학장은 물러났고, 그 후임으로 이사회가 김 학장을 다시 임명한 것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미국에 있는 내게 복직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김재준 목사, 김상근 목사 그리고 형에 학교에 돌아갈 것인지를 문의했다. 이 문의에 형은 박봉랑 목사 위의 다른 교수들은 복직 요청을 받지 못한 상태에 어찌 혼자 들어가겠느냐는  반문을 했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와 감상순 목사는 돌아가서 학교를 바로 잡고 다른 교수들도 들어오도록 노력하가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복귀해 학교를 바로 세우라는 두 분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심 끝에 1년 만인 71년 돌아왔다.